지난 추석, 완벽한 차례상 위에는 정작 아무도 모르는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 며느리는 인터넷에서 ‘차례상 차리는 법’을 검색했고, 화면 속 정갈한 표는 홍동백서와 조율이시까지 순서대로 일러주었다. 상은 표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만으로 완성됐다. 그러나 정작 그 앞에 선 사람들 가운데, 대추가 왜 그 자리에 놓였는지 아는 이는 없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과 뉴멕시코주립대학교 공동연구진은 2025년 10월 발표한 논문에서 이 익숙한 장면의 속내를 밝힌다. 연구진은 만 명이 넘는 참가자를 모아, 한쪽은 생성형 AI의 요약으로, 다른 한쪽은 기존 방식대로 웹 검색 링크를 하나하나 찾아 읽게 했다. 그 뒤 각자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써 보게 했더니, AI로 배운 이들의 글은 유독 짧았고 구체적인 근거도 적었으며 서로의 글이 놀랍도록 비슷했다. 정보를 직접 찾아 나선 사람들과 달리, 힘을 덜 들인 자리에는 남는 것도 적었다는 뜻이다.
이 조언들을 누가 썼는지 밝히지 않은 채 1493명에게 평가를 맡기자, 사람들은 AI로 배운 이의 조언을 한결같이 덜 유익하고 덜 믿음직하다고 평가했다. 연구진은 AI는 정답을 가르쳐 줄 뿐, 그 정답에 이르는 길을 스스로 걸어야 비로소 배움이 된다고 짚는다.
차례상 앞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화면 속 표를 그대로 따라 하면 상은 차려지지만, 그 뜻은 차려지지 않는다. 대추는 씨가 하나여서 임금을 뜻하고, 밤은 세 톨이 나기에 삼정승을 뜻하며, 나물과 생선은 각각 땅과 바다의 결실을 대표해 나란히 놓인다는 것. 이런 이야기는 검색창이 아니라 할머니의 목소리에서 나온다. 물어야 들을 수 있고, 그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새겨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
AI는 가르친다. 배움은 그 가르침을 스스로 붙잡고 씨름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화면 속 표는 상차림의 순서를 알려주지만, 그 순서 뒤에 담긴 마음까지 옮겨주지는 못한다. 조상을 기억하는 일도, 곁에 있는 가족을 헤아리는 일도, 누군가 가르쳐준다고 저절로 완성되지 않는다.
신앙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교리서를 통째로 외운다고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기도문을 수십 년 바치고도 그 뜻이 삶에 스며들지 않는 이가 있는가 하면, 짧은 한 구절을 붙들고 평생을 씨름하며 그 말씀을 자기 것으로 빚어낸 이도 있다.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지만, 배움은 저마다 다른 무게로 새겨진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결국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이 그 가르침과 씨름했느냐는 것이다. AI가 아무리 정교한 가르침을 내놓아도, 그 가르침을 배움으로 바꾸는 몫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명절은 지나갔지만, 그 물음은 지나가지 않았다. 조상이 왜 그 자리에 대추를 놓았는지, 부모님이 왜 그 말씀을 하셨는지, 가르침만으로는 끝내 내 것이 되지 않는 그 이유를 다음에 만나면 다시 여쭤보자. 가르침은 한 번으로 끝나지만, 배움은 죽는 날까지 계속된다. AI가 가르친다? 그래도 인간이 배워야 한다.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