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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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선의 신앙단상] 문 뒤에 놓이는 빗자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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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더 오브 몰타(Order of Malta)의 가장 뜻깊은 연례행사 중 하나는 매년 4월 말에서 5월 초, 전 세계 지부의 회원들이 프랑스 루르드(Lourdes)에 모여 함께하는 성지순례다. 나의 첫 루르드 순례는 2019년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총 10명의 회원과 봉사자들이 순례에 참여했는데, 나는 일행 중 막내였지만 현지에서 본부 및 각국 지부들과 소통하며 전체 순례 일정을 원활하게 운영해야 하는 역할을 맡았다.

출국을 앞두고 내 마음은 설렘과 기쁨보다는 무거운 불안감에 짓눌려 있었다. 갓 돌이 지난 큰아이와 처음으로 일주일이 넘는 긴 시간을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내내 마음에 걸렸고, ‘과연 내가 낯선 타국에서 이 벅찬 소임들을 실수 없이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이 나를 무겁게 눌렀다.

막상 루르드 현지에 도착하니, 그곳이 뿜어내는 영묘하고도 아름다운 분위기가 불안했던 내 마음을 차분하고 경건하게, 그러면서도 한결 기쁘게 어루만져 주었다. 하지만 그런 평화로움 속에서도 내면의 긴장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내가 지금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 걸까? 혹시 나의 미숙함이나 부족함 때문에 멀리서 온 우리 순례자들이 조금이라도 불편을 겪는 건 아닐까?’ 머릿속은 끊임없이 나 자신을 의심하고 검열하는 질문들로 가득했다. 내가 무언가를 완벽하게 해내야만 한다는 강박에 쫓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루르드 성지와 뗄 수 없는 베르나데트 성녀가 가족들과 함께 머물렀던 옛 감옥, ‘르 카쇼(Le Cachot)’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 차갑고 비좁은 공간에서 나는 성녀가 남긴 어록을 우리말로 번역해 둔 글귀 하나를 마주했다. 성모님께서 당신을 마치 ‘빗자루’처럼 사용하셨으며, 비질이 끝나면 빗자루를 문 뒤 제자리에 보이지 않게 놓아두는 것처럼 자신 또한 그저 도구로 쓰였을 뿐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짧고도 겸손한 글귀를 읽어 내려가는데, 가슴을 울리는 묵직한 깨달음과 함께 말할 수 없는 위안이 밀려왔다. 아, 베르나데트 성녀의 고백처럼 나 역시 하느님께서 지금 가장 필요한 곳에 그저 도구로 보내주신 것이구나. 내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평범하면 평범한 대로, 혹여 넘치면 넘치는 대로 다 그만한 이유와 쓸모가 있어서 나를 이 자리에 세워두신 것이구나.

나를 짓누르던 강박과 두려움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세상의 잣대나 나의 걱정과는 상관없이, 하느님은 그저 당신의 손에 쥐어진 작은 빗자루처럼 나를 알맞게 쓰고 계셨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안에 가득했던 불안이 눈 녹듯 사라졌다. 어디에 가든, 무슨 역할을 맡든 두려워하거나 쫓길 필요 없이 나는 그저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와 지금 이 자리에서의 역할에 충실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돌이 갓 지난 아이를 떼어놓고 온 낯선 성지에서,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자신을 옭아매던 나는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비질이 끝나면 조용히 문 뒤에 놓이는 빗자루처럼, 하느님의 가장 평안하고 기쁜 도구가 되는 법을 루르드의 그 작고 초라한 방에서 나는 비로소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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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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