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전문가의 간김에 순례] 94. 코티냐크 베시용 성 요셉 성지와 베르다유 은총의 성모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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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코티냐크의 베시용 언덕에 자리한 성 요셉 성지. 1660년 6월 7일 성 요셉 발현으로 시작된 순례지로 은총의 성모 성지를 맡고 있던 오라토리오회가 순례 사목을 맡아 오다가 프랑스 혁명으로 수도 생활과 순례가 단절됐다. 1975년 알제리에서 온 성 베네딕도회 수녀들이 정착해 수도원을 복구했으며 2019년부터는 마테르 데이 수도회 수녀들이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출처=베시용 성 요셉 성지
유럽에는 성모 발현 성지가 많지만, 성 요셉 발현 성지는 보기 드뭅니다. 그런데 두 성인이 한곳에 발현하여 성가정의 신앙 유산을 남긴 특별한 마을이 있습니다. 오늘 가볼 프랑스 남동부 바르주의 시골 마을 코티냐크(Cotignac)입니다.
마르세유에서 A8 고속도로를 달리다 국도로 나와 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지중해의 푸른 바다 대신 프로방스의 정겨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완만한 구릉 사이로 포도밭과 올리브나무 숲이 이어지고, 드문드문 작은 마을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코티냐크가 가까워지면 마을 뒤로 병풍처럼 솟은 황갈색 절벽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주민들이 그저 ‘바위’라고 부르는 높이 80m, 길이 400m의 거대한 석회암 절벽입니다. 절벽에는 중세 주민들의 피난처이자 저장고였던 동굴이 뚫려 있고, 정상으로 옛 두 방어탑이 남아 있습니다. 마을에 도착하면, 좁은 골목을 따라 늘어선 가옥과 색색의 덧문, 작은 광장과 분수대가 순례자를 맞이합니다.
베시용 성 요셉 성지의 수녀원 성당 내부(위)와 아버지들의 순례 모습(아래). 아버지들의 순례는 1970년대 아내와 뱃속 아기의 무사함을 청한 한 남자의 서원에서 시작된 순례로 엑상프로방스에서 코티냐크까지 약 90㎞를 걸어 감사 기도를 바친다. 이 도보 순례는 해마다 참가자가 늘며 공동 순례로 발전했다.
발현하신 성모님 약속 듣고 세운 성전
이곳이 바깥세상에 알려진 건 성모 마리아의 발현 덕분입니다. 마을 남서쪽 베르다유 언덕에 있는 은총의 성모 성당이 그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1519년 8월 10일 참나무 숲에서 기도하던 나무꾼 장 드 라 봄에게 아기 예수님을 안은 성모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곁에는 미카엘 대천사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도 함께였지요. 성모님은 이곳에 성당을 세우고, 사람들이 행렬을 지어 찾아와 기도하면 은총을 베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민들은 그해 성당을 짓기 시작했고, 1521년 레오 10세 교황은 순례자들에게 대사를 내렸습니다.
은총의 성모 성지는 프랑스 왕실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오랫동안 후계자가 없던 루이 13세 부부가 성모님의 전구를 청한 뒤, 1638년 ‘태양왕’ 루이 14세가 태어납니다. 루이 14세는 스물한 살이던 1660년, 결혼을 위해 생장드뤼즈로 향하던 중 어머니와 함께 이곳을 순례해 감사의 기도를 드렸지요. 그로부터 넉 달 뒤, 인근 베시용 언덕에서 성 요셉의 발현이라는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납니다.
코티냐크 베르다유 언덕에 자리한 은총의 성모 성지(위)와 ‘성 요셉의 길’로 향한 문(아래). 1519년 성모 발현 전승을 간직한 곳으로 성당 주변에 십자가의 길과 묵상길, 성물방이 마련되어 있다. 성 요한 공동체 수도자들이 순례 사목을 맡고 있으며, 순례자를 위한 ‘성가정의 집’을 운영한다. 베시용 성 요셉 성지와 연결되는 도보 순례길 ‘성 요셉의 길’도 조성되어 있다.
목마름으로 지친 목동 앞에 나타나신 성 요셉
1660년 6월 7일 목동 가스파르 리카르가 뜨거운 햇볕 아래 갈증에 지쳐 있을 때 한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자신을 요셉이라고 밝힌 그는 “저 바위를 들어 올려라. 그러면 물을 마실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스파르가 바위를 옮기자 맑은 물이 솟았고, 물을 마신 뒤 돌아보니 요셉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이후 발현을 기념하는 기도처가 세워졌고, 1661년 교구장은 은총의 성모 성지를 관리하던 오라토리오회에 이곳의 순례 사목도 맡겼습니다. 성모와 성 요셉을 함께 공경하도록 하려는 취지였고, 그 결과 코티냐크에 성가정 순례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은총의 성모 성당에서 발현 장소인 베시용 언덕까지는 숲길을 따라 ‘성 요셉의 길’이 이어집니다. 요셉의 꿈, 이집트 피난 등 성 요셉의 삶을 묵상하며 걷다 보면 나무들 사이로 소박한 성당과 수녀원이 나타납니다.
프랑스혁명으로 이곳 순례와 수도 생활이 단절됩니다. 하지만 1975년 베네딕도회 수녀들이 정착하면서 다시 기도의 불이 밝혀졌고, 2019년부터 마테르 데이(하느님의 어머니) 수녀회가 이어받아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수녀원 옆으로 프로방스 로마네스크 양식의 소박한 석조 성당이 붙어 있습니다. 안에 들어서면 돌벽과 아치형 천장 아래로 작은 제대가 자리하고 그 위로 십자가가 걸려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 들보에 새겨진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이사 12,3)는 성경 구절이 성 요셉 발현의 의미를 떠올립니다.
‘성 요셉의 샘’에서 시작되는 순례
성 요셉은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 다음으로 성가정에서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초기 교회에서는 순교자를 중심으로 성인 공경이 발전했기에 성 요셉 신심은 상대적으로 늦게 퍼졌습니다. 성인의 삶도 복음서를 통해 단편적으로 알려졌을 뿐입니다.
성 요셉은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와 가르멜회를 통해 널리 공경받기 시작했습니다. 대 데레사 성녀는 성 요셉을 공경하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성인의 전구를 청했고, 1562년에 세운 첫 개혁 수도원도 성 요셉에게 봉헌했습니다. 1604년에는 가르멜회가 프랑스에 진출하지요. 신심이 확산하던 시대에 성인의 발현이 있었던 겁니다.
이후 1870년 비오 9세 교황은 성 요셉을 ‘보편 교회의 수호자’로 선포했고, 2020년 프란치스코 교황도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를 통해 그 공경을 한층 깊이 다졌습니다.
성당 앞 작은 마당에 성지의 시작인 ‘성 요셉의 샘’이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요셉의 말이 한마디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 요셉은 하느님의 뜻을 듣고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지키기 위해 묵묵히 행동에 옮긴 ‘의로운 사람’입니다. 가족의 보호와 노동, 일상에서 아버지로서 책임, 평범함에서 거룩함을 꽃피운 성인입니다.
성 요셉이 이곳에서 남긴 말은 길지 않았습니다. 눈앞의 목마른 이에게 바위를 들어 올려 물을 마시라는 말뿐이었습니다. 오늘날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도 가족에 대한 걱정과 말 못 할 고민을 안고 오겠지요. 샘 앞에서 누군가의 목마름을 헤아렸던 성 요셉의 사랑을 되새겨 봅니다.
<순례 팁>
※ 마르세유·니스 연결 고속도로(A8) 이용(각 100㎞, 120㎞ 거리로 1시간 30분 소요), 레자르–드라기냥역에서 버스·택시 이용 가능하나 렌트카 권장.
※ 은총의 성모 성지 미사: 주일 및 대축일 11:00·18:30, 평일 11:30, 18:30(화-금), 베시용 성 요셉 성당 미사: 주일 및 대축일 10:30, 평일 8:30. 수녀원 내 순례자 숙소.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마련한 2027 유럽 수도원 성지 순례. 문의 및 신청: 분도출판사, 010-5577-3605(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