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사흘째, 휴대폰이 꺼졌다. 숙소 주소도, 돌아가는 길도, 심지어 오늘이 며칠인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모두 저장해 두었는데, 내 머릿속에는 어째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을까.
미국 뉴욕주 스토니브룩대학교 심리학과 연구진은 2025년 6월 발표한 논문에서, 메모를 곁에 두면 외운 것을 떠올려 답하는 성적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따져 보았다. 연구진은 그동안 발표된 연구 44편에 포함된 실험 65건을 모아 분석했다.
실험 방식은 이러했다. 참가자에게 불러 주는 글자나 해야 할 일을 기억하게 한 뒤, 한쪽은 직접 적어 둔 메모를 보며 답하게 했다. 다른 쪽은 오직 머릿속 기억만으로 답하게 했다. 두 쪽의 성적을 비교하자, 메모를 쓴 쪽이 크게 높았다.
연구진은 이 결과에서 두 가지를 읽어 낸다. 하나는 메모가 사람마다 다른 기억력의 차이를 메워 준다는 점이다. 성인의 경우,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메모를 곁에 두면 서로 비슷한 성적을 냈다. 다른 하나는 빠트리거나 틀리면 안 되는 일에 기록이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연구진은 약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어야 하는 사람이 그런 예라고 본다.
다만 연구진은 장보기 목록을 예로 들며 한계를 짚는다. 목록을 들고 가면 빠트리는 물건은 줄어들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의 기억력이 좋아졌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번 분석은 시험 순간에 메모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성적을 견주었을 뿐, 머릿속에 무엇이 남았는지는 재지 않았다.
연구진은 메모를 볼 수 없게 되자 성적이 떨어졌다는 다른 연구들도 있다고 덧붙인다. 메모가 곁에 있으면 잘 해내지만, 메모가 사라지면 머릿속에 남은 것이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일을 해내는 것과 기억하는 것의 차이는 AI와 인간의 기억이 갈리는 지점과도 닿아 있다. AI의 기억은 저장이다. 한번 담은 것은 손상 없이 그대로 꺼내 쓴다. 인간의 기억은 저장이 아니다. 담아 둔 것이 지금의 나를 건드릴 때 비로소 기억이 된다. 어떤 전쟁이 몇 년에 터졌는지 아는 것과, 그 전쟁이 왜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지 가슴이 저릿하게 아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AI는 모든 과거를 쌓아 둔다. 인간은 다 쌓아 두지 못해도, 어느 한 장면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을 맡기고 점점 더 적게 기억한다. 부모님 전화번호는 연락처에, 아이 생일은 달력 알림에, 지난달 다녀온 여행지는 사진첩에 맡겼다. 약 먹을 시간을 알림에 맡기듯, 맡겨서 이로운 것도 많다. 문제는 맡겨도 되는 것과 맡겨서는 안 되는 것을 가리지 않는 데 있다.
맡겨도 되는 것은 맡기면 된다. 그러나 맡겨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부모가 넘어졌던 자리를 다시 밟지 않으려는 마음, 받은 은혜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 앞선 세대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다짐은 저장 용량에서 나오지 않는다. 아파하며 붙든 기억에서 나온다.
저장은 데이터를 지킨다. 기억은 사람을 지킨다. 무엇을 기억하기로 하느냐가,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느냐를 정한다. 당신이 끝내 잊지 않기로 한 것은 무엇인가. AI가 저장한다? 그래도 인간이 기억해야 한다.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