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1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신앙의 자유 격변기에 세운 공소, 127년 굳건히 신앙의 전통 잇다

[리길재 기자의 공소를 가다] 39. 전주교구 진안본당 오암공소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오암공소는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이후 산에서 내려온 교우들이 형성한 터골 교우촌을 중심으로 1899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공소다. 오암공소 전경.

 


전주교구 진안본당 오암공소는 전북 진안군 성수면 중길로 232-12(중길리 53-2)에 자리하고 있다. 병인박해 이후 산속 깊은 골짜기에 숨어 살던 교우들이 성수면 중길리로 내려와 1891년께 ‘터골’ 교우촌을 이루었다. 이 교우촌을 중심으로 1899년 오암공소가 설립됐다. 오암(蜈岩)은 김해 김씨, 경주 이씨, 제주 고씨 등 다섯 가구가 마을을 이루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교우들이 산에서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조선 가톨릭교회가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올해로 140주년이 됐다.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는 처음으로 상복을 벗고 제대로 갖춘 주교복을 입고 서울과 지방의 거리를 활보하며 선교할 수 있었다.

“이제 숨을 곳도, 상복도 필요 없게 됐습니다. 우리는 밝은 대낮에 살고 있으며 얼마 안 가서 자유가 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이 변화를 가져다 준 조약에서 신앙의 자유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프랑스 국민으로서 보호받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전국을 다닐 수 있는 통행증을 갖고 있는데 우리는 마지막 장애가 제거되기를 기다리면서 이것을 활용하고 있습니다.”(「서울교구 연보 1」 95쪽)

블랑 주교의 이 기록처럼 조불수호통상조약은 조선 왕조가 가톨릭교회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1895년 9월 10일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가 고종을 예방하면서 비로소 조선 가톨릭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고종이 이 만남에서 뮈텔 주교에게 1866년 병인박해를 일으킨 것에 유감을 표명하고, 조선의 최고 통치자로서 박해를 끝낸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고종은 더불어 뮈텔 주교에게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가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오암공소는 이처럼 조선 가톨릭교회가 박해에서 해방되어 신앙의 자유를 얻는 격변기에 설립, 올해 127년을 맞았다.

 

 

오암공소 교우들은 성모 신심을 전통 유산으로 이어오고 있다. 공소 마당에 설치된 성모상과 종탑.

 


뮈텔 주교 “교우 수가 좀 지나치게 많았다”

1890년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뮈텔 주교는 1894년부터 두 해에 걸쳐 전라도 지역 사목 방문을 계획했으나 모두 무산됐다. 1894년은 동학 농민전쟁으로, 1895년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취소했다. 1896년 고종과 왕세자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숨긴 ‘아관파천’ 사건이 발생, 또다시 전라도 사목 방문이 무산될 뻔했으나 뮈텔 주교는 ‘교구장은 착좌 후 5년 이내에 관할 교구 지역을 모두 시찰할 의무가 있다’는 교회법에 따라 강행했다.

뮈텔 주교의 전라도 사목 방문은 1896년 10월 29일부터 1897년 1월 22일까지 86일간 진행됐다. 이때 뮈텔 주교는 진안 터골을 방문했다. “진안 터골로 갔다. (⋯) 12월 5~6일 만나야 할 교우 수가 좀 지나치게 많았다. 터골과 산 너머 장재동은 논농사와 담배농사를 짓는 마을이었다.”(「뮈텔 일기」 1896년 12월 4일) 당시 터골 교우촌에는 299명의 교우가 생활했다. 뮈텔 주교가 “교우 수가 좀 지나치게 많았다”고 일기에 남길 만큼 터골은 당시 진안 지역 교우촌 가운데 교세가 가장 컸다.

 

 

1970년 아이들의 불장난으로 마을 전체가 화마에 휩쓸렸지만 유일하게 오암공소만 그 피해를 모면해 주민들의 대피소로 사용됐다. 오암공소 내부.

 


순교자 후손 김재덕 주교 배출

진안 출신으로 한국 교회 안에 가장 널리 알려진 사제는 제5대 전주교구장 김재덕(아우구스티노, 1920~1988) 주교와 시편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모두 옮긴 최민순(요한, 1912~1975) 신부다. 김재덕 주교가 오암공소 출신이다.

김재덕 주교는 순교자의 후손이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김영오(아우구스티노)는 충청도 홍성에 살면서 성직자 영입을 위해 조선 밀사 일행으로 북경을 두 차례 다녀왔다. 이후 전라도 고산 배재에서 살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돼 13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됐다. 이후 김영오는 진산과 연산으로 옮겨 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돼 공주 감영에서 그해 8월 28일 순교했다.

김재덕 주교는 1947년 사제품을 받은 후 제4대 전주교구장 한공렬(베드로) 주교를 수행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참관했다. 그는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1973년 2월 10일 제5대 전주교구장 주교로 임명된 후 3월 19일 주교품을 받고 전주교구장에 착좌했다. ‘모든 것은 그분을 통해서’를 사목 표어로 정한 김재덕 주교는 교구장 재임 8년 동안 평신도 사도직 운동 활성화, 교구 재정 운영 정상화,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헌신했다. 그는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강조, 정의와 인권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유신 정권 치하에 있던 위정자들에게는 경종을, 주교단과 성직자, 수도자들에게는 반성을, 교우들에게는 자각을 호소했다. 건강상 이유로 1981년 4월 자진 사임한 김 주교는 요양 중 1988년 69세 나이로 선종했다.

 

 

순교자의 후손인 제5대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가 오암공소 출신이다. 오암공소 제단.

 


농번기에도 짬 내 기도하러 오는 교우들

1970년 4월 오암공소 주변에 큰불이 났다. 공소 옆 밭에서 아이들이 마른 콩깍지에 불을 붙이고 소꿉놀이를 하다 불어오는 바람에 불씨가 날려 공소 주위 13개 초가가 전소했다. 마을 전체가 화재 피해를 보았으나 오암공소만 멀쩡해 주민들의 임시 대피소로 사용됐다. 대부분 교우였던 이재민들은 새집을 지을 때까지 남자들은 공소 강당에, 여자들은 공소 사랑채에서 생활했다.

오암공소는 1977년 12월 8일 한들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한들 관할이 됐다가 1985년 1월 25일 한들본당이 폐쇄됨에 따라 진안본당 관할 공소로 지금까지 소속돼 있다.

지금의 오암공소 건물은 1979년 2월 1일 봉헌됐다. 76㎡(23평) 규모의 시멘트 벽돌집인 오암공소는 2010년 지붕을 강판으로 바꾸고 창문을 보수했다. 이어 2021년에 외벽을 새로 칠하고, 출입문과 회중석을 교체하고, 공소 주변으로 나무를 심었다. 공소 마당의 성모상은 1988년 8월 11일 축복했다.

오암공소는 마을 진입로 변에 있다. 5년 전 수리를 해서인지 깔끔하다. 출입구의 큰 십자가와 마당에 설치된 성모상과 종탑이 인상적이다. 공소 나무 바닥은 무슨 이유인지 흰색 페인트로 줄을 그어 회중석을 나눠 놓았다. 한 단을 올려 회중석과 구분한 제단에는 제대와 십자가, 예수 성심상과 성모상, 성 요셉상이 있다. 또 제단과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온풍기와 칠판이 설치돼 있다. 양 벽면에는 기다란 창들이 나 있고, 십자가의 길 14처 성화가 장식돼 있다.

오암공소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현재 교우 수 50여 명을 유지하고 있다. 교우들 대부분은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다. 전통적으로 성모 신심이 깊은 오암공소 교우들은 농번기에도 틈을 내 공소를 찾아와 기도하고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할 만큼 열심이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10-21

관련뉴스

말씀사탕2026. 10. 21

콜로 3장 12절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