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부가 입법부와 사법부, 그리고 국민적 공감대를 모으는 최소한의 절차조차 거치지 않은 채 ‘임신 9주 이하 대상 낙태약 단계적 도입’ 방침을 기습 발표해 파장이 일고 있다.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 이후 관련 입법이 오랫동안 미비한 상황에서 법적·임상적 검증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약물 허용 소식은 보건의료계와 사회 각계에 깊은 우려를 주고 있다.
정부는 낙태약 도입이 여성의 안전한 의료 체계 진입을 돕는 조치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임신 중지’로 포장된 낙태는 단순한 과정의 정지가 아닌, 한 인간의 소중한 생명의 시작을 거두는 일이다. 더욱이 도입하려는 낙태약(미페프리스톤 등)은 해외에서도 위험성과 부작용 논란이 지속 중인 의약품으로, 미국 FDA는 올해 안전성 재평가를 시행했고, 결과는 2027년 공개 예정이다.
국제적으로도 낙태 약물의 안정성을 재검증하는 단계에서 국내 도입을 서두르는 것은 국민 건강을 담보로 한 무모한 행정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법적 형평성과 수순 측면에서도 심각한 허점이 드러난다. 법제처는 현행법상 약사법 기준에 따른 수입 허가가 가능하다고 결정하면서도, 이것이 약물에 의한 개별 낙태 행위의 적법성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국회의 법률 정비가 선행돼야 함을 분명히 했다. 낙태 허용 주수나 세부 기준에 대한 입법적 합의가 부재한 상태에서 식약처의 품목 허가만으로 약물이 유통·처방된다면 의료 현장과 법체계 전반에 극심한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의학적 관점에서도 약물 낙태의 위험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 2021년 대한산부인과학회가 경고했듯, 먹는 낙태약은 수술적 시술보다 안전하다고 단정할 수 없으며 대량 출혈, 불완전 유산, 감염 등 중대한 합병증을 동반할 수 있다. 지난 7월 정부의 낙태약 허용 검토 당시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역시 복용 전 반드시 초음파 검사를 시행해야 하고 부작용 대책이 선행돼야 함을 강조하며, 대책 없이 의료진 재량에만 책임을 떠넘기는 정책에 강하게 반발한 바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1년 조사에 따르면, 약물 낙태를 시도한 여성의 약 70가 불완전 유산 등으로 수술치료를 받아야 했다.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는 대면 진료 없이 낙태 약물의 접근이 쉬워지면서 약물 낙태 비중이 최근 4~5년 사이 4~15배로 급증했고, 여성 건강의 위험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고위험 임산부는 늘어나는 반면 이들을 치료할 의료 인프라는 점차 악화하고 있다. 현재 국내 산부인과 의원 중 입원 병상이 없는 곳이 74.5에 달하고, 매년 산부인과 전공의 지원 인력도 감소 추세다. 이처럼 의료 인프라조차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낙태 약물 복용 후 출혈이나 합병증으로 의료기관을 찾는 상황이 빈번해진다면, 과연 정부의 장담대로 여성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인간의 생명과 건강이 걸린 문제에서는 약물 접근성보다 안전성 검증과 의료 대책이 훨씬 우선돼야 한다. 진정한 여성의 권익과 생명의 존엄은 약물 복용을 ‘손쉽게’ 만드는 데서 오지 않는다. 접근성이 용이해질수록 생명을 경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확산되고 생명윤리 의식이 약화될 위험이 크다.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서둘러 약물 수입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초음파 검사와 대면 진료 의무화, 충분한 상담과 숙려 기간 설정, 위기 임산부 지원 체계 구축 등 여성과 태아 모두를 온전히 보호할 법적·제도적 안전망을 마련하는 것이다. 안전성과 사회적 합의가 확보되지 않은 만큼 낙태약 도입은 즉각 재검토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