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본당 순례단이 성 샤스탕 신부가 사목했던 말레이시아 페낭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성당을 순례하고 있다.
서울대교구 용산본당, 브뤼기에르 주교 흔적 찾아 순례
방콕 이어 주교 머문 말레이시아 페낭·필리핀 마닐라 찾아
페낭에서 조선 선교 자원한 샤스탕 신부 현양 열기에 놀라
주교 12일간 머문 마닐라 주교좌 성당 방문해 순례 마무리
홍수 여파로 방콕의 4대 성당 모두를 방문할 수 없어서 아쉬움이 컸다. 그나마 이번 순례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로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목 거점이었던 시암대목구 주교좌 성모 승천 대성당만이라도 순례할 수 있었던 것이 위로가 됐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발자취를 찾아가는 서울 용산본당 순례단은 수해를 입은 묵주의 성모 성당 외관을 잠시 둘러보고 말레이시아 페낭으로 향했다.
방콕에서 페낭까지 비행 시간은 1시간 50분이었다. 짧았지만 인상적이었다. 페낭으로 가는 저가 항공기는 방콕의 버스처럼 통풍구에서 하얀 냉기를 쉴 새 없이 내뿜었다. 마치 냉동 창고에 들어온 듯했다. 모두 냉기를 막아줄 방풍 재킷과 두꺼운 옷들을 주섬주섬 꺼내 입었다. 정상 고도에 오른지 얼마 안 돼 난기류로 기체가 심하게 요동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페낭 공항에 착륙해서는 비행기 뒷문으로 내려 걸어서 계류장까지 갔다. 그리고 일행 가운데 가장 몸이 불편한 순례자의 짐가방이 박살 난 채 나왔다. 낮게 가라앉은 회색 비구름같이 모두가 우울했다. 하지만 무거운 마음도 잠시뿐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공부했다는 안내자의 재치있는 입담에 금세 밝아졌다.
전각에 모신 샤스탕 신부 성상.
페낭에서 사목 이어가며 조선 파견 준비
브뤼기에르 주교는 1827년 1월 12일 마카오에서 시암대목구 선교사로 임명돼 방콕으로 갈 때, 그리고 1831년 4월 21일 방콕을 떠나 조선으로 향할 때 두 차례 페낭에 도착했다. 특히 2번째 페낭 방문 때 그는 1832년 8월 4일까지 1년 3개월을 페낭에 머물렀다. 그가 페낭에 있을 때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31년 9월 9일 로마 성모 마리아 대성전에서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낭에 머물면서 자신에게 직면한 3개의 현안을 해결했다. 먼저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고 자신이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사실을 몰랐던 그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편지를 써 본회의 교황 파견 선교사들이 조선 선교를 맡아야 할 당위성과 조선 선교를 자원한 자신을 지지하는 선교지 주교들을 밝혔다. 또 마카오에 있는 교황청 포교성성 대표부장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빨리 조선으로 파견되기를 희망한다”고 압박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낭 신학교에 주로 머물면서 페낭과 싱가포르, 그리고 말레이반도 남쪽 도서 지역 선교 활동을 시암대목구 부대목구장 주교로서 지휘했다. 그리고 그는 풀로 티쿠스에 자리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성당 주임이며 페낭 신학교 교수로 활동하던 샤스탕 신부가 동행해 조선으로 가고 싶다고 밝히자 시암대목구장이 허락하고 조선 선교지에 관한 일이 진척되면 꼭 부르겠다고 약속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조선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줄 안내인을 선발했다. 그는 샤스탕 신부와 페낭 신학교장 롤리비에 신부가 추천한 신학생 출신 왕 요셉을 낙점했다. 왕 요셉은 그에게 “이 선교 임무 중 생기는 위험에 맞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고 무엇보다 하느님을 위해 저의 생명을 내어놓는 것은 두렵지 않고 오히려 열망한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페낭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성당 성해실.
말레이시아 페낭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성당 성해실에서 서울 용산본당 주임 황응천 신부가 기도하고 있다.
성 샤스탕 신부의 페낭 사목지 방문
용산본당 순례자들은 샤스탕 신부가 사목하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성당을 방문했다. 학기 중이어서 지금의 페낭 신학교는 방문할 수 없었고, 조지타운에 있던 옛 신학교 터도 버스 안에서 스쳐 가듯 볼 수밖에 없어 아쉬웠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성당은 꽤 크고 아름다웠다. 야자수들과 어우러진 로마네스크풍의 성당이 무척 이국적이었다. 성당에 들어선 순례자들은 성 샤스탕 신부에 대한 현지인 교우들의 공경과 현양 열기에 깜짝 놀랐다. 성당 안에는 샤스탕 신부를 비롯한 여러 성인의 성해가 모셔져 있었다. 현지인 교우들은 이 성해실에서 정성스럽게 기도하며 성인들의 전구를 빌고 있었다. 성당 정문에는 샤스탕 신부의 모자이크화가 설치돼 있고, 마당에는 샤스탕 신부의 성상을 모신 전각이 있었다.
서울 용산본당 순례단이 페낭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성당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 현양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용산본당 순례단은 이 성당에서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와 성 샤스탕 신부 현양 미사를 봉헌했다. 영성체 후 묵상 중에 샤스탕 신부가 이곳에서 친구 베지앙 신부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읽은 1830년 8월 25일 자 샤스탕 신부의 편지 내용은 이랬다.
“친구여! 와라. 열심한 우리 여러 친구들 중 몇 명을 데려와 조선으로 보내달라고 청해라. 조선으로 가게 되면, 너희는 그곳에서 세례성사 외에 어떤 성사도 받지 못했고 하느님의 말씀 듣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만날 거야. 만나는 조선 교우들에게 너희는 ‘말씀’이라는 빵을 주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빵을 줄 것이며, 그 교우들이 순교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킬 것이야. 그리고 너희도 그곳에서 진짜 사도로 생활해서 순교할 준비를 할 것이야. 그런 후 순교자들이 누리게 되는 영광을 누릴 것이야.”
순례단이 정성스레 미사를 드리는 동안 이어서 진행될 혼인 미사 하객들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혼인 미사 준비에 마음이 바쁠 것이고, 신랑 신부를 축하하기 위해 떠들썩할 만한데도 모두가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를 위해 침묵하며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했다. 순례자를 우선으로 배려하는 페낭 교우들의 품격 있고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필리핀 마닐라 주교좌 준대성전 전경.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닐라에서 세귀 대주교의 환대로 12일간 머물렀다.
마닐라 주교좌 준대성전 청동문 앞에서 순례 일정을 마치고 기념 사진을 찍고 있는 용산본당 순례단.
브뤼기에르 주교 발길 머문 마닐라
용산본당 순례단은 4박 6일의 마지막 일정으로 필리핀의 마닐라 주교좌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준대성전을 찾았다. 1832년 9월 30일 마닐라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와 왕 요셉은 제21대 마닐라대교구장 세귀 대주교의 환대를 받으며 12일간 이곳에 머물렀다. 세귀 대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와 왕 요셉이 마카오로 가는 뱃삯도 대신 내어줬다. 그는 신학생 김대건과 최양업이 스승 신부들과 함께 1839년 4월 19일부터 11월 26일까지 7개월여간을 마닐라와 롤롬보이에 머물 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닐라대교구 준대성전(Minor Basilica) 중앙 청동문 위에는 ‘TIBI CORDI IMMACULATO CONCREDIMUS NOS AC CONSECRAMUS’(당신의 티 없으신 성심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봉헌합니다)라 새긴 라틴어 기도문이 있다. 안타깝게도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기도문을 보지 못했다. 이 기도문은 마닐라 준대성전이 1958년 8번째로 지어졌을 때 새겨진 글귀이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마닐라에 도착했을 때 주교좌 성당은 1760년에 5번째로 지어진 성당이었다.
필리핀 마닐라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 정문 앞에서 한 용산본당 순례자가 기도하고 있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는 티 없으신 성모 성심께 수차례 자신을 맡기고 봉헌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은 그토록 가고 팠던 조선 땅을 밟지 못했지만, 그의 바람대로 한국 교회는 원죄 없으신 성모께 봉헌돼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가 복자와 성인들 대열에 들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