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강 삼각주의 남쪽 끝, 지중해와 석호 사이에 자리한 생트 마리드라메르. 낮은 흰색 집과 붉은 기와지붕이 모여 있는 마을 중심에 노트르담 드 라 메르(바다의 성모) 성당이 보인다. 해변에는 카마르그식 투우가 벌어지는 투우장과 요트 정박지가 자리하고, 마을 뒤편으로는 광활한 카마르그 습지가 펼쳐진다. 인구 2500여 명의 작은 도시지만, 여름 휴가철과 순례 축일에는 방문객들로 붐빈다. 출쳐=셔터스톡
성경에 등장하는 ‘마리아’하면 누구를 떠올리시나요? 성모 마리아, 그다음은 마리아 막달레나일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의 마리아, 부활 아침 무덤을 찾은 마리아와 같은 다른 마리아들도 등장합니다. 예수님 시대 ‘마리아’, 곧 히브리어 ‘미르얌’은 우리나라의 ‘영숙’이나 ‘정희’처럼 흔한 이름으로, 당시 이름이 기록된 유다 여성 다섯 명 가운데 한 명꼴이었습니다. 지금도 아이 이름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남부 카마르그 지방에는 두 마리아의 이름을 품은 마을이 있습니다. 생트 마리드라메르, 곧 ‘바다의 성 마리아들’ 마을입니다. 주님 부활 아침 빈 무덤을 찾은 세 여인 가운데 두 사람인 마리아 야코베와 마리아 살로메를 공경하는 마을이지요.
노트르담 드 라 메르 성당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빗살형 종탑. 현재 성당은 1170~1180년경, 두 성인의 무덤이 있다고 믿었던 옛 소성당을 보존한 채 그 둘레에 세워졌다. 외부 침입을 대비해 14세기 초 상부에 성곽과 돌출 방어시설을 더하고, 벽에는 화살 구멍처럼 좁은 창을 냈다. 엑상프로방스·아를 대교구 소속 본당이자 순례 성지로, 성 마르티노 공동체가 사목을 맡고 있다.
반 고흐도 찾았던 푸른 바닷가 마을
마르세유에서 아를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가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프랑스 남부와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물길과 갈대밭이 끝없이 이어지는데,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가 떠오르지만, 그보다 훨씬 광활하지요. 석호·습지·염전 사이로 홍학이 먹이를 찾고, 초지에는 카마르그 지방의 상징인 흰 말과 검은 황소가 보입니다.
평원 끝에 자리한 생트 마리드라메르는 아담한 어촌입니다. 1888년 반 고흐도 이곳을 찾아 성당을 중심으로 들어선 붉은 기와지붕의 집들, 해변에 놓인 어선들을 두 화폭에 담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마을에는 휴양지의 활기가 넘칩니다. 좁은 골목마다 카페와 식당이 이어지고, 그 끝에는 푸른 지중해가 펼쳐집니다. 바로 이 바다를 건너 성 마리아 야코베와 성 마리아 살로메가 이곳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노트르담 드 라 메르 성당의 본랑(왼쪽)과 제단부 위 성 미카엘 소성당에 모셔진 두 성인의 성해함(오른쪽). 제대 앞에는 바닷가 마을에서 귀한 담수를 얻던 우물이 자리한다. 성 미카엘 소성당은 원래 요새 경비병실이었으나, 1448년 성해가 발견되면서 이를 모시는 소성당으로 바뀌었다. 해마다 세 차례 주요 순례 축일(5월 24~25일, 10월 셋째 주일, 12월 첫째 주말)에 밧줄을 이용해 제단으로 내린다.
3500㎞ 바닷길 건너와 부활 전한 성인들
마리아 야코베는 복음서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로 등장합니다. 마리아 살로메는 제베대오의 아내이자 사도 큰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 여겨집니다. 두 여인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 들었고, 십자가 죽음을 멀리서 지켜봤습니다. 안식일이 지나 마리아 막달레나와 함께 향료를 들고 무덤을 찾았다가 부활 소식을 듣지요. 슬픔의 현장을 지켰던 이들이 주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박해가 닥치자 두 성인은 라자로·마리아 막달레나·마르타 등과 함께 팔레스티나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들은 돛도 노도 없는 배에 태워 바다로 내몰렸지만, 하느님의 인도로 카마르그 해안에 무사히 닿았습니다. 당시 뱃길로 3500㎞나 떨어진 먼 곳이었죠. 다른 제자들이 프로방스 각지로 떠난 뒤에도 두 성인은 이곳에 남아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고 신앙 공동체를 일궜습니다.
두 성인을 향한 공경은 마을 중심의 노트르담 드 라 메르(Notre-Dame-de-la-Mer), 즉 바다의 성모 성당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곳에는 6세기부터 성당이 있었으며, 12세기 후반 그 옛 성당을 감싸듯 지금의 성당이 세워졌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 두 성인의 무덤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다의 성모 성당은 다섯 개의 종이 달린 종탑이 없었다면 중세 성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화려한 조각이나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 창 대신 높고 두꺼운 석벽과 화살 구멍처럼 좁은 창이 외관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14세기에는 지붕 둘레에는 침입자를 막는 돌출 방어시설도 갖췄는데, 당시 성당은 바닷길로 들이닥치는 약탈자들을 피해 주민이 몸을 숨기던 요새이기도 했지요.
노트르담 드 라 메르 지하 소성당(위)과 5월 순례 축제의 바다 행렬(아래). 두 마리아를 맞이하고 섬겼다고 전해지는 검은 피부의 사라는 집시와 이동생활 공동체가 특별히 공경하는 성인이다. 해마다 5월 24일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이 사라의 성상을 모시고 바닷가로 행렬한다. 이튿날에는 마리아 야코베와 마리아 살로메의 성상을 태운 배를 어깨에 메고 바다로 나아간다.
성해 모시고 바다로 행렬하는 순례지
성당 안에 들어서면 좁은 창으로 스며든 빛이 장식 없는 어둑한 공간을 비춥니다. 높은 석조 천장 아래 본랑 중앙에 철제 울타리로 둘러싸인 담수 우물이 눈길을 끕니다.
제단 위쪽에 두 성인의 성해함이 자리합니다. 두 성인에 대한 공경이 본격화된 것은 교황들이 프랑스 아비뇽에 머물던 14세기였습니다. 앞서 1279년 생 막시맹에서 성 마리아 막달레나의 성해가 발견되면서 프로방스 일대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공경이 고조되고 있었지요. 1315년에는 아를 대주교의 승인으로 두 성인을 공경하는 신심회가 설립됐고, 14세기 중엽에는 프랑스 여러 교구의 주교가 이곳을 순례했으며, 15개 교구에서 두 성인의 축일을 기념했습니다.
이곳 순례는 1448년 새로운 전기를 맞습니다. 프로방스 백작 르네 당주의 명령으로 성당을 발굴해 두 성인의 성해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해 12월 성해를 제단 위쪽의 성 미카엘 소성당에 모시면서 이곳은 두 성 마리아의 공경 중심지로 확고히 자리 잡습니다. 또 두 성인의 성해를 모시고 바다로 향하는 순례 행렬도 시작됐지요. 프랑스혁명 때 중단된 이 행렬은 1862년 신심회가 재건되면서 부활했습니다.
성당을 나와 마을 골목을 따라 걸으면 이내 드넓은 바다와 마주합니다. 망망대해로 내몰렸던 두 성인은 낯선 땅에서 어떤 삶이 기다릴지 알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그들은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 바닷가에서 두 성인을 맞아 오랫동안 섬겼다고 전해지는 성 사라도 그 믿음의 여정에 함께했습니다. 오랫동안 떠돌이 생활과 차별을 겪어 온 집시 공동체가 성 사라를 자신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하는 이유도 헤아릴 수 있을 듯합니다.
해마다 5월이면 유럽 각지의 순례자들이 성 사라와 두 성인의 성상들을 모시고 바다로 향합니다. 제각각 삶의 무게를 안고 바다에 선 이들은, 막막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자신을 맡겼던 두 성인의 믿음을 되새길 겁니다. 그 말씀은 오늘의 순례자들에게도 들려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순례 팁>
※ 아를에서 자동차로 40분(39km), 아를역에서 직행버스(A50)로 약 1시간.
※ 바다의 성모 성당 미사: 주일 및 대축일 10:30, 평일 18:00(화, 금, 토), 순례자의 집 운영.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 마련한 2027 유럽 수도원 성지 순례. 문의 및 신청: 분도출판사, 010-5577-3605(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