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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몰 아픔 딛고 선 신앙 거점… 교우촌 후손들 제집처럼 가꿔

[리길재 기자의 공소를 가다] 40. 전주교구 진안본당 부귀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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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치하 박해기 그리스도인들은 병인박해 이전부터 진안 부귀면 곳곳에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부귀공소 전경.


전주교구 진안본당 부귀(거석)공소는 전북 진안군 부귀면 부귀로 313-18(거석리 784)에 자리하고 있다. 진안은 백제의 고토이다. 조선 시대 진안현 내면, 외면, 삼북면이 1914년 일제에 의해 부귀면으로 통합됐다. 부귀(富貴)는 이곳 진산(鎭山) 부귀산에서 따왔다. 부귀면은 진안군 서부에 위치한다. 부귀면은 동북쪽으로는 정천면, 동남쪽으로는 진안읍, 남쪽으로는 성수·마령면, 북쪽으로는 완주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부귀면은 거석·궁항·두남·봉암·세동·수항·신정·오룡·황금 9개 행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조선 왕조 치하 박해기 그리스도인들은 병인박해 이전부터 진안 부귀면 곳곳에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부귀공소 전경.


1860년대 전후 골짜기에 자리잡은 교우촌

진안 땅에 가톨릭 신앙 공동체 교우촌이 가장 많이 생겨난 시기는 1860년대 전후이다. 전라도 어느 곳이든 사람이 숨어 살 수 있는 곳이면 교우촌이 있었다. 이 시기 교우촌(공소)은 하나같이 깊은 산 속 험하고 가파른 골짜기에 자리했다. 부귀면에도 활목·서촌·방각골·봉암·수항 등 교우촌이 여럿 있었다. 1883~1884년 진안 지역 교세 통계표에 따르면 부귀면 방각골공소 교우 수가 119명이나 됐다. 또 1899~1900년 교세에는 부귀면 활목공소에 교우 107명이 생활하고 있었다. 이처럼 19세기 말 진안 부귀면에는 상당수의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었다.

부귀면은 마령·백운·성수면과 함께 1922년 6월 진안 한들본당이 설립되면서 그곳 관할이 됐다. 이후 1952년 4월 29일 한들본당이 폐쇄되고 진안본당이 설립돼 진안 관할로 편입됐다. 1977년 12월 8일 다시 한들공소가 진안본당에서 분리돼 본당으로 승격됐을 때 부귀면의 거석·황금·수항(한실골)·봉암·방각·적래공소가 한들에 속하게 됐다. 1985년 1월 25일 한들본당이 다시 폐쇄되자 모든 관할 공소는 진안본당으로 이관됐다.

 
부귀공소 교우들은 하느님을 체험하고 일치와 성덕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다. 부귀공소 성모상.


6·25전쟁 속 신앙의 증인들 배출한 부귀면

1950년 인민군이 진안 땅을 점령하고 빨치산이 한들성당을 습격했을 때 5명의 교우가 희생됐다. 이들 신앙의 증인 가운데 최원숙(요한, 26세)과 진정기(베네딕토, 나이 미상)가 부귀면 출신이다.

최원숙은 경찰 출신으로 부귀면 신정리에 살았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한들교우촌에 숨어 지냈다. 전쟁 중에도 그는 수시로 사제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고 미사에 참여하는 등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1950년 9월 12일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그는 그리스도인일 뿐 아니라 경찰 신분이 발각돼 전주교도소에 갇혔다. 그는 북한 보위부원들에게 혹독한 심문을 당한 후 그해 9월 26일 밤 전주교도소에서 처형됐다.

진정기는 부귀면 봉암리 소태정에서 살았다. 그는 6·25전쟁 때 북한 공산당에 협력하지 않아 반동분자로 분류됐다. 신심 깊은 그는 공소 운영에 참여하고 전교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많은 외교인이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51년 2월 21일 빨치산에 체포돼 완주군 동상면으로 끌려가 다음 날 총살됐다.

부귀공소는 용담댐과 인연이 깊다. 1960년대 중반 진안군에는 1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았다. 우리나라 농촌 대부분이 그랬듯이 산업화와 도시화로 진안군 인구도 점차 감소했다. 이 여파로 진안군에 있던 진안과 한들본당도 통합됐다. 1990년대 들어서 진안군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용담댐 건설 사업이 확정된 것이다. 용담댐 건설사업은 1992년 10월 첫 삽을 뜬 후 2001년 10월 준공될 때까지 총사업비 1조 5620억원이 투입될 만큼 대규모 토목사업이었다. 총저수량이 8억 1500만 톤에 달하는 용담댐은 우리나라에서 소양강댐, 충주댐, 대청댐, 안동댐 다음으로 5번째 규모이다.

용담댐 건설에는 적지 않는 지역민의 희생이 따랐다. 1개 읍 5개 면 20개 리 68개 마을 950만 평이 수몰돼 2864가구 1만 2600여 명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삶의 터전을 잃고 이주해야만 했다. 진안군 인구가 37% 감소했다. 이 여파로 진안본당 교우 수 또한 1991년 2791명에서 2001년 2191명으로 600명이 줄었다.

 
부귀공소 교우들은 순교자들의 후손답게 여전히 겸손하고 열심하다. 부귀공소 제단.


1997년 보상금으로 건립된 거점 공소

부귀공소는 1997년 6월 29일 공소 축복식과 함께 설립됐다. 부귀공소는 용담댐 건설로 수몰된 용담공소 보상금으로 지어졌다. 당시 진안본당 주임 범석규(마티아) 신부는 부귀공소를 부귀면 수몰 지역 거점 공소로 만들 계획이었다. 용담 지역뿐 아니라 봉암·황금·수항공소 교우들이 부귀공소에서 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사목했다. 이후 많은 은인의 도움으로 부귀공소는 회합실을 짓고, 평신도 선교사를 초대해 공소 활성화를 꾀했다. 회합실은 10여 년 피정의 집으로 운영돼 공소 재정에도 많은 보탬이 됐다.

부귀공소 건물은 165㎡(50평) 크기의 붉은벽돌 건물이다. 공소 정문 위에 두 팔을 펼치고 이곳을 찾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예수상이 있다. 부귀공소는 여느 농촌 성당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공소 규모도 그렇고 너른 마당과 회합실 등 모든 것을 갖췄다. 주변에 학교와 논, 그 뒤로 펼쳐진 제법 높은 산들이 목가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부귀공소 내부 바닥은 나무 무늬 장판으로 치장돼 있고 회중석은 100명이 앉아도 될 만큼 넉넉하다. 두 계단으로 회중석과 구분한 제단에는 나무 제대와 십자가, 성모상과 요셉 성상이 있다. 양쪽 벽면에는 채광을 좋게 하려고 큰 창들을 뒀고,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할 수 있는 색유리화 시트지로 마감해 놓았다. 공소 앞마당 한편에 성모상을 두고 돌로 아치 장식을 해 놓았다.

 
부귀공소는 용담댐 건설 당시 수몰된 용담공소 보상금으로 지어졌다. 부귀공소 내부.


나눔과 매일 기도 실천하는 교우촌 후손들

부귀공소 교우 중에는 조선 왕조 치하 박해기 때부터 부귀면에 살던 교우들의 후손들이 적지 않게 있다. 그래서인지 교우들은 공소를 제집처럼 가꾼다. 그 정성이 공소 곳곳에 배어있다. 먼지 한 톨 없을 만큼 깔끔한 공소 내부는 물론 너른 마당조차 말끔하게 잔돌을 깔아 놓았다.

부귀공소 교우들의 신앙심은 어떨까? 순교자들의 후손들답게 그 깊이와 품격이 여전하다. 이들의 신심을 엿볼 수 있는 글이 있다. “교우들은 좀도리 쌀을 모아 연옥 영혼을 위한 미사 예물로 봉헌하고, 교구 사회복지시설에도 기증해오고 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교우들 스스로 몸소 실천하고 있다. 더불어 교우들은 하느님을 체험하고 ‘일치’와 ‘성덕’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다.”(전주교구 홈페이지-전주교구의 작은 교회 공소를 찾아서<42> 인용)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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