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종일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가 10월 16일 서울 송파구 자택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영국 체류 때부터 대북정책 함께 설계
“복음 속 하느님의 햇빛, 누구에게나 비춰…접근 방식 달라”
“통일은 체제 아닌 인도주의 문제…‘사람의 고통’ 돌봐야”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며 한반도 화해와 평화의 물꼬를 튼 김대중(토마스 모어) 전 대통령. 그의 대북 포용책인 이른바 ‘햇볕정책’에 마태오 복음의 정신이 담겨 있었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졌다. 김대중 정부에서 국가정보원 해외·북한 담당 1차장을 지낸 라종일(요셉)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를 통해서다. 라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이 영국에 체류하던 시절부터 대북정책을 논의하며 햇볕정책의 기틀을 다지는 데 함께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주영 대사를,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NSC 상임위원장과 주일 대사를 지냈다.
라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이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한 뒤 자신이 박사 학위를 받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로 초대한 일화를 전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영국에서 6개월간 지내는 동안 가장 많이 한 일이 햇볕정책에 대한 의논이었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1998년 4월 영국 런던대학교에서 이솝우화를 인용해 햇볕정책을 소개했다. 하지만 라 교수는 사실 이 정책의 진정한 배경에는 마태오 복음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솝우화가 밝히듯 바람이 나그네를 괴롭히면 나그네는 외투를 더 단단히 여미지만, 햇볕을 쬐면 외투를 벗는다는 지혜는 참 좋다”면서도 “이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기 위한 전략적인 접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복음 속 하느님의 햇빛은 누구에게나 비춘다는 점에서 접근의 방식이 엄연히 다르다”며 한반도 통일 문제 역시 복음 정신, 인도주의 정신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반도 평화를 둘러싼 긴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9월 21일 비무장지대(DMZ) 군사분계선(MDL) 이남에서 북한이 매설한 지뢰로 우리 군 장병 3명이 다쳤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와 대남 강경 메시지도 이어지는 가운데, 한반도 평화 정착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라 교수는 한반도 평화를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김일성 일가의 정권 유지 전략’을 꼽았다. 그는 “학자는 자신의 잘못을 책임지고 돌이킬 수 있지만, 정치인은 도덕적 책임을 넘어 실질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며 “한국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 ‘한반도 통일’과 ‘공산주의 실현’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모두 달성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미국이 침략했고, 자신이 그걸 막았으니 큰 업적을 이룬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만약 권력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면 이런 거짓말이 모두 밝혀질 수 있다”며 “더욱이 외부 정보의 유입을 막으면서 가족 정권 승계의 명분을 챙기기 위해 북한은 외부의 위협을 빙자한 한반도 긴장 상황을 일부러 계속 유발하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라 교수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는 서유럽의 선례를 보면 자유민주주의 아래 여러 체제가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며 “통일도 이런 의미에서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통일은 어느 체제가 통치하느냐의 문제가 아닌, 인도주의적 문제”라고 강조했다. 북한 주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고통받는 만큼 통일의 과정이나 완성 단계에 있어 국민 삶의 구체적인 필요를 충족하고 도덕적인 수준을 향상하는 것을 주된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권력이나 체제 경쟁이 아닌 사람 중심의 통일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거듭 역설했다.
라 교수는 우리 정치권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논의에 집중하지 못하고 정쟁을 벌이는 현실을 비판하며 우리 군 장병들이 다친 상황에서도 초당적 대응을 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의 지뢰 매설은 엄연한 도발”이라며 “여야가 합심해 대응해야 할 판인데 지금의 모습은 감투만 바라면서 여당과 야당 안에서도 서로 갈리는 추태”라고 지적했다.
라 교수는 “북한보다 경제적 능력이 60배나 높은 우리가 대응 못 할 게 무엇이 있느냐”며 “그러나 지금의 정치판은 정치가 아닌 정쟁을 하고 있다”고 거듭 비판했다. 이어 지난해 이재명 대통령이 우리 국민이 북한에 억류된 것을 인지하지 못했던 상황을 언급하며 “‘사람의 고통’을 돌보는 것이 평화 통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도 했다.
민족화해를 위한 노력을 이어가는 가톨릭교회에도 당부를 전했다. 라 교수는 “햇볕정책에서 빠진 게 있다면 양측 정부 사이에서 있던 일로 그친 것”이라며 “쉬운 일은 아니지만, 교회 또한 인도주의적 접근으로 더욱 동반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