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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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마지막 숨결 남긴 곳에서 마주한 ‘이웃 천사들’

[내 친구 아쿠티스를 찾아서] (5) 성인이 선종한 곳, 몬차 성 제라르도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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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티스, 백혈병 진단·열다섯 살에 선종
성인 치료받은 병원 내 자리한 성해·이콘

취재 마친 뒤 어머니 코피로 당황했지만
두 은인의 배려로 진료 받고 무사히 지혈 




“저는 여기서 살아 나가지 못할 거예요.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2006년 10월, 이탈리아 몬차 성 제라르도 병원에 도착한 성 가롤로(카를로) 아쿠티스가 어머니 안토니아 살차노 여사에게 건넨 말이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난 9월 11일, 아쿠티스가 생애 마지막 사흘을 보낸 성 제라르도 병원 구관 11층을 찾았다. 내부 구조가 바뀌어 당시 그가 머문 병실은 특정할 수 없었다. 다만 담당 의료진의 기억을 토대로 아쿠티스가 들것에 실려 올라왔던 엘리베이터 자리와 옛 병동으로 이어지던 통로는 확인할 수 있었다.

성 제라르도 병원은 1174년 몬차의 수호성인인 평신도 성 제라르도 데이 틴토리가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위해 세운 구호시설에서 출발했다. 오늘날 밀라노 비코카대학교 의과대학과 연계한 공립 종합병원이다.

 
20년 전 아쿠티스의 마지막 사흘 동안 그를 돌본 몬차 성 제라르도 병원 소아혈액종양과 클라우디아 네그리 간호사가 경당에 있는 성해 앞에서 미소 짓고 있다.
 
몬차 성 제라르도 병원 소아혈액종양과 클라우디아 네그리 간호사와 경당에 있는 성해 앞에서. (왼쪽부터) 어머니 정진 작가와 클라우디아 간호사, 이학주 기자, 통역사 이경진씨.


위중한 상태에도 의료진에게 미소 지어줘

아쿠티스는 처음 감기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다 급성 전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그 무렵 그는 연옥을 거치지 않고 곧장 하늘나라에 가고자 자신의 고통을 교황과 교회를 위해 주님께 봉헌하겠다고 했다. 가족들은 평소 장난기 많던 아들이 농담하는 줄 알았지만, 병세는 급격히 악화했다. 성 제라르도 병원으로 이송될 때는 이미 위중했다.

당시 아쿠티스를 돌봤던 소아혈액종양과의 클라우디아 네그리 간호사는 기자와의 만남에서 “소년의 차분한 태도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몹시 쇠약했지만, 의료진의 물음에 가능한 한 답하고 처치에도 협조했다고 한다. 다만 네그리 간호사는 당시 그 모습을 병세의 영향으로 받아들였다.

“아쿠티스가 병상에 누워 우리를 바라보며 미소 짓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아쿠티스는 병원에서 원목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성체를 모셨다. 그리고 혼수상태에 빠져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아쿠티스가 혼수상태에 빠져 우리 병동에서 긴급히 기관 삽관을 해야 했습니다. 당시의 숨 가쁘고 긴박했던 상황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아쿠티스는 10월 11일 결국 뇌사 상태에 빠졌고, 이튿날 오전 6시 45분 심장 박동이 멈췄다. 열다섯 살이었다.
 
성 아쿠티스가 생애 마지막 사흘을 보낸 이탈리아 몬차 성 제라르도 병원 경당. 기도 공간에는 성인의 초상화와 성해를 간직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성 아쿠티스가 생애 마지막 사흘을 보낸 이탈리아 몬차 성 제라르도 병원 경당. 성체조배 공간에는 성인의 이콘이 있다.


병원 안에 성인 위한 공간 조성

병원 내과계 진료부에서 근무하는 미술사학자 막달레나 몬제라씨의 안내로 옛 병동을 둘러봤다. 그곳에는 지난 2월 ‘아쿠티스의 친구들협회’ 회원인 조반니 에미디오 팔라이아 신부가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기증한 그림 2점이 걸려 있었다. ‘인류 위의 신성한 빛’과 아쿠티스가 좋아한 돌고래가 그려진 ‘바다의 카니발’이었다.

병원 경당 기도 공간에는 색유리 장식과 어우러진 아쿠티스의 초상이 걸려 있다. 초상 오른쪽 아래에는 살차노 여사가 기증한 머리카락 성해가 모셔져 있고, 감실 옆에는 성체를 받쳐 든 성인의 이콘이 자리한다.

 
이탈리아 몬차 성 제라르도 병원 경당 성체조배 공간에 있는 아쿠티스 성인의 이콘.


선종 20주기인 지난 10월 12일 병원은 ‘성인들의 정원’도 개장했다. 설립자 성 제라르도를 비롯해 병원과 인연이 있는 성 루이·젤리 마르탱 부부, 성 바오로 6세 교황, 성녀 잔나 베레타 몰라, 아쿠티스를 기리는 공간이다. 아쿠티스 가족이 기증한 올리브나무도 심어졌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백혈병을 앓는 어린이들이 치료받고 있다. 클라우디아 간호사는 한 환아의 어머니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 어머니가 ‘우리 아들이 치료받는 바로 이곳에서 아쿠티스도 치료받았다는 게 사실인가요? 간호사님이 그를 직접 아셨다는 것도 사실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네, 사실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분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두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성 아쿠티스가 생애 마지막 사흘을 보낸 이탈리아 몬차 성 제라르도 병원 입구.
 
성 아쿠티스가 생애 마지막 사흘을 보낸 이탈리아 몬차 성 제라르도 병원 병동으로 향하는 복도.


“성인이시여, 순례자를 위해 빌어주소서!”

취재를 마치고 기자가 어머니 정진(로사) 작가와 밀라노 숙소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갑자기 정 작가의 왼쪽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 런던행 비행기와 전날 밀라노에서도 코피가 났지만, 이번에는 좀처럼 멎지 않았다. 어둑해진 길가에 어머니가 주저앉았다. 기자는 응급차를 부르려 했지만 정 작가는 병원비를 걱정하며 만류했다.

“잠깐만, 학주야! 우리 기도하자!”

가슴이 철렁하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의지할 사람이라곤 낮에 통역을 맡긴 밀라노 한인본당 신자 이경진(가타리나)씨뿐이었다. 몬차에 사는 이씨는 자신도 두 자녀를 성 제라르도 병원에서 낳아 잘 안다며 그곳으로 오라고 안심시켰다. 피가 묻은 어머니를 부축해 전철역으로 향하던 중 익숙한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전날 방문했던, 아쿠티스가 교적을 두고 신앙생활을 한 밀라노 숨은 성모 성당이었다. 순간 전율이 일었다. 성당을 바라보며 다시 기도했다.

“아쿠티스 성인이시여, 당신의 길을 순례하는 저희 모자를 위해 빌어주소서! 당신의 어머니 안토니아 여사도 아시시에서 꼭 만나고 싶습니다.”

 
기자와 어머니에게 큰 도움을 준 성 제라르도 병원 미술 큐레이터 막달레나 몬제라(오른쪽)씨와 병원 언론홍보실장 베로니카 토다로씨가 선물로 건넨 아쿠티스 키링을 든 채 웃고 있다. 이들도 아쿠티스 이콘 복제품 등을 선물로 줬다.


위기 속 만난 착한 사마리아인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코피는 몬차행 전철에서 다행히 멎었다. 역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기다리던 이씨를 만나자 긴장이 풀려 눈물이 났다. 몇 시간 전 취재했던 병원에 환자의 보호자로 돌아왔다.

이씨의 연락을 받은 막달레나씨도 병원으로 달려왔다. 취재차 낮에 불과 한 시간 남짓 만났을 뿐이었는데, 막달레나씨는 이미 퇴근한 뒤임에도 식료품을 사다 주고 진료가 끝나기를 기다려줬다. 자정 무렵 응급실 진료가 끝나자 이씨는 다음 날 이비인후과를 찾으라는 의료진의 말을 통역했다.

막달레나씨는 기자와 어머니를 차로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밀라노 숙소까지 태워다줬다. 감사 표시를 계속 거절하던 그에게 어머니는 가방에 남아있던 사과 한 개를 건넸다. 아쿠티스가 첫영성체를 한 베르나가 수도원 정원에서 딴 사과였다. 지난해 수도원을 덮친 큰 화재에도 정원은 피해를 면했다. 사연을 듣고서야 사과를 받아든 막달레나씨에게 기자도 약속했다.

“저는 오늘 착한 사마리아인을 두 명이나 만났습니다. 저도 낯선 이가 어려움에 빠진 걸 본다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막달레나씨는 미소 지으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주님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는 뜻의 평신도 봉헌생활 공동체 ‘메모레스 도미니(Memores Domini)’ 회원이라고 소개했다.

이튿날 세 번째로 찾은 성 제라르도 병원. 이씨가 마음이 쓰인다며 통역 일정을 취소하고 진료에 동행했다. 정 작가의 콧속 출혈 부위를 지혈한 이비인후과 의사는 예정대로 아시시에 가도 된다며 한 가지 부탁을 전했다.

“아시시에서 아쿠티스 성인을 만나게 되면, 저를 위해서도 꼭 기도해 주세요!”

마지막 진료까지 곁을 지켜준 이씨에게 거듭 감사 인사를 전하고, 어머니와 기자는 밀라노 중앙역으로 향했다. 두 은인의 따뜻한 배려와 의사의 기도 부탁을 마음에 담고 6시간이 걸리는 아시시행 열차에 올랐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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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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