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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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례궁 화려함 사라진 자리, 143년간 이어온 신앙의 전통

[리길재 기자의 공소를 가다] 41. 전주교구 무주본당 무풍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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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무주본당 무풍공소는 1883년 설립돼 올해로 설립 143년을 맞았다. 무풍공소 전경. 야트막한 시멘트 담이 인상적이다.


전주교구 무주본당 무풍공소는 전북 무주군 무풍면 고도2길 29(현내리 653-5)에 자리하고 있다. 덕유산과 대덕산, 삼봉산을 끼고 있는 무풍면은 조선 시대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하나로 왕과 왕족을 위 한 행궁인 ‘명례궁’이 있을 만큼 풍광이 수려한 곳이다. 명례궁은 무풍면 현내리 북리 마을에 있었다. 명례궁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등 세월이 흐르면서 해체되어 팔리기도 하고, 주민들이 점유해 살림집으로 변했다. 지금은 명례궁 터에 안내 표지판만 있을 뿐이고, 여전히 주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다. 무풍공소가 이 명례궁 터에 자리하고 있다.

 
무풍공소 입구.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예수 성심상은 폐쇄된 괴목공소에서 모셔왔다. 공소 입구에 들어서면 루르드의 성모 발현 동굴처럼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성모 동굴이 보인다.


무풍면은 삼한 시대부터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이곳을 신라 사람들은 ‘무산’(茂山), 백제인들은 ‘적천’(赤川), 통일 신라는 ‘무풍’(茂豊)이라 불렀다. 조선 시대 무풍면은 전쟁과 전염병, 정쟁 등 환난에서 벗어난 곳이었다. 또 전라도 전주와 진안, 경상도 김천과 대구, 거창, 충청도 대전과 인접한 교통 요지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대대로 자족하면서 넉넉한 삶을 살아갔다.

 
무풍공소는 4명의 수도자를 배출했다. 루르드의 성모 발현 동굴처럼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무풍공소 성모 동굴.


박해 피해 숨어든 이들, 교우촌 일구다

이곳에 박해를 피해 천주교인들이 숨어들어왔다. 1866년 병인박해 이전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 여우내에 무주본당의 모태가 되는 교우촌이 형성됐다. 이 여우내를 중심으로 무주군 일대 여러 곳에 교우촌이 세워졌고 다블뤼 주교와 최양업 신부가 이 지역을 사목 방문했다.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 복자 신태보(베드로)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순교자들의 후손과 교우들 40여 명을 이끌고 강원도 풍수원에 숨어들어 교우촌을 이룬 인물이다. 그는 1801년 이후 시작된 교우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글로 남겼다. “우리는 오래지 않아 한집안 식구나 다름없이 서로 깊고 진실하게 정이 들게 되었다. 우리는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주일과 축일의 의무를 지키기 시작했다. (⋯) 내 마음속에는 기쁨과 행복이 번졌다. 그것은 보물을 발견한 거나 다름없다. 나는 이 교우들을 천사처럼 사랑했다. (⋯) 모든 이가 그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아주 아무것도 없는 형제들에게 무슨 도움을 베풀어 줄 줄을 알았고, 과부와 고아들을 거두어 주니, 이 불행한 시절보다 우애가 더 깊었던 일은 일찍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2권 17~18. 23쪽)

1866년 병인박해로 무주의 교우촌은 많은 피해를 봤다. 이후 1878년 블랑·두세 신부가 무주 일대를 순회하며 전교했다. 이후 여우내와 무풍에 교우들이 다시 모여 화전을 일구고 교우촌을 재건했다. 또 충청도 영동 지역에서 박해를 피해온 교우들이 옹기를 구워 생활했다.

1883년 초대 금산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로베르 신부는 무풍과 여우내공소를 설립했다. 무주 지역에 공소는 이 두 곳뿐이었다. 그해 7월 무주 지역을 처음 사목했던 블랑 신부가 일본 나가사키 오우라 성당에서 제7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주교품을 받았다.

무풍공소 설립 당시 교우 수는 40여 명이었다. 하지만 무풍공소는 박해를 피해 잠시 머물던 장소였기에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대부분이 고향으로 다시 가거나 생업을 찾아 타지로 떠나 1940년까지 50여 년간 공소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다.

 
지금은 일흔 살이 가까운 10여 명의 교우들이 지키고 있지만 공소 모든 곳에 그들의 정성된 손길이 묻어 있다. 무풍공소 내부.
 
무풍공소 제단. 제대와 십자가, 예수 성심상과 성모상이 있다.


50년 불 꺼진 공소, 아가타가 다시 밝히다

1941년 10월 무풍면 은산리에 원호인·호영 형제가 이사 와 교우들을 찾아 신앙 모임을 하면서 불 꺼진 공소에 온기가 일기 시작했다. 6·25전쟁 때 서울에서 무풍면 북리로 피난 온 이분이(아가타)씨가 전교하고 홀로 신앙생활을 하던 교우들을 모아 신자 수가 크게 늘었다. 휴전 후 1954년 교우들은 북리에 집 한 채를 사들여 공소 건물로 사용했다. 그해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공소를 방문한 금산본당 김영태 신부가 이 집을 ‘현내공소’라 했다.

1956년 9월 금산본당 은산·철목·연내·율속공소를 통합해 무주본당이 설립되면서 무풍공소 관할도 이관됐다. 초대 무주본당 주임 서정수 신부는 1957년 3월 10일 북리 현내공소를 매각한 자금과 옥수수 가루, 옷 등 구호물자를 아껴 모은 돈으로 지금의 공소 땅과 집을 사들인 후 당시 돈 2000환을 들여 공소 건물로 개수했다. 그리고 ‘무풍공소’라 이름 지었다.

 
공소 양 벽면에 설치돼 있는 십자가의 길 14처 부조. 입체적이고 채색이 잘돼 있다.


문 닫은 공소서 모셔온 두 팔 벌린 예수상

무풍공소는 올해로 설립 143년이 되는 무주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활동 공소이다. 무풍면 시장 뒤편에 자리한 무풍공소는 마당 입구에 반만 쌓아놓은 낮은 시멘트 담장이 인상적이다. 마당으로 들어서면 공소 입구에 마치 루르드 성모 발현 동굴처럼 자연석으로 쌓은 조형물에 성모상을 안치해 놓았다.

공소 건물 입구에는 ‘천주교 무풍공소’라는 현판과 함께 두 팔을 활짝 벌린 예수상이 이곳을 찾는 이들을 반기고 있다. 원래 종탑이 있던 자리인데 오래되어 무너질 위험이 있어 종탑을 철거한 뒤 괴목공소를 폐쇄할 때 그곳 예수상을 모셔와 모두가 볼 수 있게 입구에 안치했다. 철거한 종은 공소 마당 한쪽에 녹슨 채 덩그러니 놓여 있다.

공소 내부는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나무 바닥과 천장을 받치는 나무기둥들이 그대로 노출돼 있다. 천장은 부녀회에서 1974년 보수한 것이어서 살짝 처져 있지만, 최근에 새로 칠을 했는지 깔끔하다. 양 벽면에는 공소 건물 크기와 비교하면 제법 큰 십자가의 길 14처 부조가 설치돼 있다. 예수님의 수난을 생생하게 묵상할 수 있도록 잘 채색된 십자가의 길 14처 부조가 꽤 인상적이다.

제단에는 제대와 십자가, 예수 성심상과 루르드의 성모상이 있다. 제대와 십자가, 성상들의 비율이 안 맞는 것으로 보아 공소 입구 예수 성심상처럼 폐쇄된 공소나 다른 본당에서 가져온 듯하다.

무풍공소에는 1974년 공소 발전과 관리를 위해 부녀회가 조직됐고, 1976년에는 신학생 후원회와 레지오 마리애 샛별 쁘레시디움이 창단됐다. 무풍공소는 4명의 수도자를 배출했다. 여느 시골 공소처럼 50~70대가 청년이고, 10여 명의 교우가 공소를 지키고 있다. 사과 농사를 지으며 바쁘게 생활하지만, 공소를 보존하고 관리하는 데 한마음으로 힘을 보태고 있다. 그래서 무풍공소 모든 곳에 교우들의 정성이 묻어 있는 것이 느껴진다. 조선 시대 행궁인 명례궁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유서 깊은 교우촌의 역사가 아득해 보여도 143년간 이어온 신앙의 전통은 모든 이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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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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