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냉면을 처음 먹는 사람은 낯선 맛과 식감에 당황하기도 한다. 쫄깃한 면에 익숙한 이들은 뚝뚝 끊기는 면발을 보고 덜 삶은 게 아닌가 의심하기 십상이다. 슴슴한 육수에 ‘아무 맛도 안 난다’며 그릇을 밀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몇 번 맛보다 보면 담백함 속에 숨은 깊은 맛을 알게 된다. 그렇게 북녘 지명을 품은 평양냉면은 이제 남한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 음식이 됐다.
음식은 고향을 이름에 달고도 사랑받는다. 그러나 정작 북녘에서 온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을 숨기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탈북민들 이야기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얼굴이어도, 말투 하나에 출신이 드러나고, 때론 그 차이가 보이지 않는 경계가 된다.
cpbc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은 특별 기획 ‘런던의 평양냉면’을 통해 지난 6~10월 영국과 한국을 오가며 탈북민 4대 가족과 남한에 정착해 가정을 꾸린 탈북민들, 이들과 삶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국경을 넘은 뒤에도 남아있는 차별과 편견, 그 경계를 허물어가는 일상을 들여다봤다. 특히 7월 10일부터 일주일간 남북한 출신 주민들이 어울려 사는 영국 런던 남서부 뉴몰든을 찾았다. ‘유럽의 통일촌’으로도 불리는 이곳에서 남과 북이 함께 살아가는 ‘미리 온 통일’의 일상을 살펴봤다.
첫 편 ‘국경은 넘었지만, 경계는 남았다’에서는 북한을 떠나 한국으로, 다시 머나먼 영국 런던까지 건너간 뒤에도 이들 곁에 그어진 보이지 않는 선에 대한 증언을 모았다. 분단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낸 세대가 국경을 넘은 뒤에도 마주해야 했던 차별을 짚고, 남과 북의 경계에 얽매이지 않는 아이들에게서 공존과 평화의 가능성을 찾아봤다.
런던 뉴몰든에 탈북민 천여 명 거주
영국·한국서 만난 탈북민 가족 조명
차별과 편견 넘어 공존의 길 찾아
2만여 명의 한인이 모여 사는 영국의 대표적인 ‘코리아타운'인 뉴몰든(New Malden) 시내 전경.
영국 속 탈북민들의 보금자리
영국 런던 중심부에서 차로 약 30분 거리에 위치한 ‘뉴몰든(New Malden)’. 이곳은 2만여 명의 한인이 모여 사는 영국의 대표적인 ‘코리아타운’이다. 그 이름답게 뉴몰든 거리를 걷다 보면 ‘이모네’ ‘술집’처럼 한글 간판이 여기저기 보인다. 한국어 역시 자연스럽게 들린다. 영국의 한 거리에서 한국의 일상을 마주하는 셈이다.
뉴몰든이 여느 코리아타운과 다른 점은 수많은 탈북민의 보금자리라는 것이다. 이곳의 한인 가운데 1000여 명은 탈북민으로 추정된다. 한국과 중국 외 지역에서 뉴몰든만큼 큰 규모의 탈북민 공동체가 형성된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2004년 영국 정부가 북한 출신을 난민으로 인정하면서 탈북민의 영국행도 늘어났다. 한국에 정착했다가 자녀 교육과 새로운 삶을 찾아 영국으로 이주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1990년대부터 코리아타운이 형성돼 언어 소통과 일자리 마련이 비교적 수월한 뉴몰든으로 자연스레 모여들었다. 뉴몰든이 코리아타운을 넘어 ‘리틀 평양’, ‘유럽의 통일촌’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이유다.
무더위가 내려앉은 7월 중순, 뉴몰든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주택가에 자리한 교회 앞에는 ‘뉴몰든한글학교’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별도의 교사(校舍) 없이 교회 공간을 빌려 운영하는 이 학교에서는 뉴몰든에 사는 한인 가정과 한국에 관심이 있는 현지 가정의 아이들이 함께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운다.
이날 학교에서는 여름방학을 앞두고 마지막 수업이 열렸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던 교회 마당은 곧 방학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입구에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시구로 잘 알려진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을 한 글자씩 적은 삼각형 깃발들이 만국기처럼 걸려 있었다. 그 곁에선 이향규(테오도라, 59) 학교장이 아이들을 한 명씩 맞이했다.
이향규씨가 등교하는 최찬양·최찬미 자매와 함께 깃발에 적힌 한글을 살펴보고 있다.
등교가 마무리될 무렵, 연분홍·연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어린 자매가 마당 안으로 들어왔다. 이씨는 이들에게도 반갑게 인사하고는 바로 앞에서 펄럭이던 깃발 하나를 가리켰다. “찬미야, 이거 네가 그린 거, 무슨 글자야?”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듯 최찬미(5)양은 웃기만 했다. 대신 함께 온 언니 최찬양(7)양이 옆 깃발에 적힌 글자까지 하나씩 소리 내어 읽었다. “너.도.그.렇.다.” 이씨는 흐뭇한 표정으로 자매를 바라보다 교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국경을 세 번 넘은 가족
학교로 들어가는 선생님과 아이들 뒤로 형광색 축구 유니폼을 입은 채 어린 손녀들을 배웅하는 한 어른이 눈에 띄었다. 외할아버지 박화경(57)씨다. 2001년 두만강을 건넌 그는 중국과 한국을 거쳐 2007년 영국에 정착했다. 지금은 뉴몰든에서 아내와 아들, 딸 부부, 세 손주와 함께 살아간다. 서울에는 그의 어머니 이순경(81)씨가 살고 있다. 북한에서 시작된 한 가족의 삶이 한국과 영국에 걸쳐 4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뉴몰든에 닿기까지 여러 경계를 넘어야 했다. 함경북도 웅기군(현 나선시 선봉구)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박씨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고, 이후 가족은 원래 살던 집을 떠나 전기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농촌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는 “아버지가 잡혀가신 이후 사회적으로 질타받고 감시받는 대상이 됐다”며 “사람답지 못하게 살았다”고 털어놨다.
정치적 낙인 속에 살아온 그였지만, 고향은 여전히 그리움의 대상이다. 박씨는 “고향을 떠올리면 눈물이 나고 가슴이 벅차면서 꼭 가보고 싶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토록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가, 강을 넘었다. 자신보다 먼저 중국으로 넘어간 어머니와 남동생을 찾기 위해, 먹고살기 위해서.
“제가 중국으로 넘어간 건 어떠한 사상적 이념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어요. 오직 어머니를 찾기 위해, 먹고살기 위해 넘어간 것이지, 북한 땅이 싫어서라거나 이념 때문에 떠난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후 아내도 딸을 데리고 북한을 떠났다. 당시 어머니의 어깨에 올라타 깊은 두만강을 건너온 아이가 지금 세 자녀의 어머니가 된 박세염(33)씨다. 이후 잠시 중국에 머물던 박씨 가족은 주변의 도움을 받아 2001년 한국에 닿았다. 중국 생활도 그럭저럭 꾸려갈 만했지만, 계속된 단속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박씨 가족은 서울 월계동에 자리를 잡아 그곳에서 6년을 살았다.
박씨는 자신을 받아준 남한에 대한 고마움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북한 사람들이 벽돌 한 장 쌓아준 것도 없고 도와준 것도 없거든요. 그런데도 우리를 받아준 게 너무나 고맙지요.”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서운함도 남아있다.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로 사람들한테 무시를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크게 신경 쓰진 않았지만, 그때마다 속상했죠.”
보이지 않는 차별 넘어 온전한 ‘한반도의 자녀’ 꿈꾸다 탈북민 7명 중 1명 여전히 차별 경험
자녀에게 대물림될까 하는 우려
자녀들, 출신 구별 않고 자라길 희망
박화경(가운데)씨가 영국 뉴몰든의 한 공원에서 동네의 한인들과 함께 축구를 하고 있다.
어느 날 아내가 영국 이민을 제안했다. 아이들에게 더 나은 교육 환경을 마련해주고 싶다는 이유였다. 박씨는 그렇게 가족과 다시 새 삶을 찾아 떠났다. 영국에 정착한 후 그의 삶은 달라졌다. 북한에 있을 때는 김일성 생일 같은 ‘특별한 날’에나 할 수 있었던 것이 축구였는데, 이젠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이 됐다. 주말이면 인근 공원에서 한 동네 한인들과 어울려 축구를 하곤 한다. 그의 팀에는 남북한 사람이 섞여 있다. 뉴몰든 공원의 양지바른 잔디밭은 갈라졌던 한민족이 한데 어울리는 ‘작은 통일의 자리’가 된다.
영국 뉴몰든에 사는 박화경씨 가족이 저녁을 먹으며 식탁에 둘러앉아 환하게 웃고 있다.
박씨는 한인들이 다니는 개신교회 장로로 활발한 신앙생활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사람답지 못하게 살던’ 그에게 손주들이 태어났다. 새롭게 생긴 취미,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준 신앙, 부쩍 늘어난 가족들까지. 그는 영국에 정착한 뒤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영국에서도 차별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몇 번의 국경을 건너 자리 잡은 영국에서도 인종차별을 피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보다 이곳에서의 차별이 ‘덜 가슴 아프다’고 털어놨다. “여기 와서도 차별 많이 받거든요. 인종차별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같은 민족한테 무시당하고 차별당하는 것보다 가슴이 덜 아팠습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이순경씨가 영국 뉴몰든에 살고 있는 가족들과 영상 통화를 하고 있다.
서울에 남은 어머니의 기억
8월 19일 서울 공릉동의 한 아파트. 박화경씨의 어머니 이순경(81)씨가 사는 집이다. 이씨가 휴대전화로 영상 통화를 걸자 뉴몰든에 있는 증손녀 찬양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이고 우리 찬양이네. 찬양아.” 곧이어 찬미도 화면에 나타나 인사를 건넸다. “증조할머니, 안녕하세요.”
이씨는 장남 박화경씨보다 앞서 1997년 두만강을 건넜다. 몇 달 전 먼저 탈북한 막내아들을 찾기 위해 중국으로 넘어갔고, 이후 2002년에는 먼저 한국에 정착한 박화경씨 가족을 따라 한국에 왔다. 그는 새벽 비행기 창밖으로 본 한국의 모습이 24년이 지난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고 했다.
“새벽에 비행기에서 보니까 다 십자가 불이었고, 얼마나 환하던지⋯. 한국 사람들이 잘산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잘살 줄은 몰랐어.”
그는 큰아들이 영국으로 떠나던 때도 생생히 기억했다. “우리 큰아들 떠날 때 말렸지. 하지만 가야 한대. 자기 세계로 나가야 한다고.”
이씨는 큰아들이 영국 이주를 결정했던 이면에는 ‘아이들 교육 문제’ 외에 다른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넌지시 전했다. 아들이 취업 면접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린 것이다. “면접에서 말을 하다 보면 자기 근본을 속일 수 없잖아. 그러면 ‘북한에서 왔습니다. 나는 탈북자입니다’ 이야기해야 해. 그럼 ‘가서 기다려요’ 하지. 그러면 그게 끝이야. 다시 안 부르지.”
탈북민을 가두는 선
지금도 많은 탈북민에게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지고 있다. 남북하나재단의 ‘2025 북한이탈주민 실태조사’에 따르면,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최근 1년간 차별이나 무시를 경험했다는 응답은 14%였다. 조사 이래 가장 낮은 수치지만, 여전히 탈북민 7명 중 1명꼴로 차별을 겪고 있다. 남한에 정착한지 3년 미만인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그 비율이 21.4%로 높아졌다. 차별을 경험한 이들의 72.3%는 말투와 생활방식, 태도 등 문화적 소통방식의 차이를 이유로 꼽았다.
대구에서 평양냉면 전문식당을 운영하는 하진우(32)·김봄순(31)씨 부부는 2010년대 중반 북한을 떠나 한국에 정착했다. 부부는 “회사 면접 때 ‘조선족 같아서 저희 회사랑 안 맞을 것 같다’는 말까지 들어봤다”며 “면접에 통과됐던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탈북민 출신 배경을 아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때 전하고 싶다는 박현우·윤현지 부부.
2017년 한국에 와 지난해 남한 출신 아내 윤현지(발렌티나, 32)씨와 가정을 꾸린 박현우(발렌티노, 34)씨 역시 탈북민이라는 이유로 편견 어린 말을 들은 경험이 있다. “대학 시절 한 동기가 낡은 빌라를 가리키며 ‘북한에는 이런 건물이 없느냐’고 물어보길래 ‘아니야, 아파트 살다 왔어’ 그러니까 ‘북한에 아파트 없잖아, 거짓말한다’ 그러면서 ‘그럼 왜 왔어, 다시 가지’ 이러더라고요.”
이제 두 부부의 걱정은 이런 편견이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아내와 함께 대구에서 평양냉면집을 운영하고 있는 하진우씨.
하진우씨는 “제 자식만큼은 저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라며 “딸만큼은 북한에 대한 편견, 사회의 편견이 없이 살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아내 김봄순씨는 딸이 언젠가 부모의 고향을 묻는다면 숨김없이 말해주겠다고 했다. “저는 그대로 얘기를 할 것 같아요. 북한에서 태어난 게 죄는 아니잖아요.”
첫돌이 지나지 않은 아이를 키우는 박현우씨는 자녀가 아빠의 고향과 삶을 이해할 만큼 자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이다. “너무 어릴 때 전하면 삶에 혼돈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윤현지씨는 주변 시선에 아이가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까 우려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중요시하는데, 자녀가 아무리 아빠의 출신에 대해 자긍심을 느낀다고 해도 주변 시선이 좋지 않으면 영향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어요.”
The Whole Korean, 온전한 한국인
두 부부가 고민하는 ‘그때’를 먼저 겪은 이가 있다. 박화경씨의 딸 박세염씨다. 그는 영국에 오면서 자신의 출신을 밝힐지를 두고 고민했다. 한국에서는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불편함 없는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중학교 1학년 때 영국으로 이주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낯선 학교에서 ‘North or South?’ 식으로 질문받을 때마다 박씨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는 숨는 길을 택했다. “내가 North Korea(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말이 길어지고 나는 대답할 게 없을 텐데… 그래서 South Korea(남한)라고 했어요.”
주변의 시선에 움츠러들던 그는 뉴몰든에서 지내면서 “출신을 밝히는 게 어려울 것 없는 일임을 알게 됐다”고 했다. “솔직하게 말해도 다들 그렇게 새로워하지 않으시더라고요. 여기는 원래 북한 분들도 많으시니까 그냥 ‘그렇구나’ 라고 대해 주셨어요.”
영국 뉴몰든에서 세 남매를 키우는 최재원·박세염 부부. 이들은 아이들이 남과 북을 나누지 않고 한민족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자라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씨의 남편 최재원(36)씨는 아이들이 남과 북이라는 출신에 얽매이지 않고 살았으면 한다고 전했다. “아이들에게 우리 민족에 대해 설명해준 일이 있었어요. 그때 ‘You are neither South Korean nor North Korean. You are whole Korean’이라고요. ‘너는 반쪽의 위, 반쪽의 밑이 아니라 한반도 땅의 자녀’라는 의미에서요.”
이는 스페인에서 태어난 한국인인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정체성 혼란 끝에 내린 답이다. 어디 출신인지 고민하기보다 ‘그 사람 자체’를 보자는 게 그의 깨달음이었다. 아내가 탈북민 출신임을 알았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니 그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아빠의 기대에 부응해 자녀들은 ‘남과 북’을 구분하지 않았다. “같은 말을 하니 같은 나라”라고 했다. 부부의 바람은 하나다. 아이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밝게 살아가는 것”이다. 최씨는 이런 아이들의 모습이 “통일의 그림”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
“목숨을 걸고 왔는데, 같은 언어, 같은 얼굴을 지녔는데도 경계하고 있으면 똑같이 가시 돋친 모습으로 대하지 않을까요. 누구든 상처받고 싶어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같은 사람이고 색깔이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서로를 마주하고 만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