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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처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시다

[월간 꿈 CUM] 안성철 신부의 십자가의 길 묵상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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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돌무덤에 묻히신 구세주 예수님, / 저희가 주님의 죽음을 생각하며
언제나 깨끗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 사랑의 성체를 받아 모시게 하소서.

무덤…. 무덤은 ‘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차갑고 어둡습니다. 생명이 아닌 죽음을 간직한 그곳에 예수님이 묻히십니다. 돌문이 닫힙니다. 캄캄합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모든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마치 영화가 끝나고 사람이 모두 빠져나간 후 불 꺼진 영화관이 떠올려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무덤은 끝이 아닙니다. 또 다른 시작을 예고하는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무덤에서 다시 일어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끝을 나타내는 장소가 아니라, 부활을 증거하는 장소입니다.

무덤은 영원한 생명, 영원한 자유를 얻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입니다. 그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부활은 불가능합니다. 무덤을 피한다면 부활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부활은 캄캄한 무덤의 문을 열고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있을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태중의 아기는 세상의 존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합니다. 어머니의 자궁을 열고 나오면 엄청난 환희의 세상이 펼쳐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편안한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계속 머물고 싶어 합니다. 세상에 나오는 순간 울음을 터트리는 이유도 그래서 입니다. 세상에 나오기 싫은데 강제로 나왔으니 기분이 좋지 않겠죠. 하지만 태중의 아기가 세상에 나가는 두려움 때문에 어머니 뱃속에 안주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기는 엄마의 자궁을 열고 나와야 새로운 삶(부활)을 살게 됩니다. 

무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덤은 부활로 가기 위한 하나의 문입니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지 못합니다.

나 개인의 편안함과 안락함만 추구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지 못합니다. 죽음이라는 고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무덤에 묻혀야 합니다. 그럴 때 부활의 영광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이뤄집니다.

특히 나 한 명이 이러한 부활을 의미를 살아갈 때, 세상은 변화됩니다. 작은 별 하나가 파선 직전의 배를 항구로 인도하듯이 십자가를 당당하게 짊어지고 가는 나의 작은 변화 하나가 우리 주변을 조금씩 변화시킬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우리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글 _ 안성철 신부 (마조리노, 성 바오로 수도회) 
삽화 _ 김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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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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