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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시기, 죽음 각오하고 십자가를 끌어안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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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키려고 십자가를 밀쳐내고 저항할 때 죽음은 시작되지만, 몸을 아끼지 않고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수용할 때 오히려 생명을 얻는다. OSV


“죽으면 썩을 몸뚱이 아껴서 뭣해!” 생전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다. 가난한 시절, 우리의 부모는 가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전력투구하며 몸을 불살랐다. 죽으면 썩을 몸, 아낄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가난 자체가 이미 죽음이었기에 죽음을 껴안고 살았을 것이다. 친구처럼 동료처럼 죽음과 줄타기를 하면서 더불어 살았을 것이다. 웬만한 고난도 품고 가야 할 운명이었으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때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생명은 지키는 것이 아닌 연장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몸이 너무도 소중해졌다. 몸을 지키려 안간힘을 쏟다 보니 ‘건강염려증’이란 병까지 생겼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생명을 연장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것 같은 태세다. 생명 연장을 위해 의료검진에 돈을 펑펑 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가난은 ‘죽음’을 품어야 할 친구로 만들었고, 부는 죽음을 회피해야 할 이방인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고 수시로 내 몸을 들여다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막연한 두려움을 주는 것이 건강검진이다. 주의 요망이 갈수록 늘어가고 검진결과가 긴장되고 불안할 때가 있다. 재검받으라는 연락이 오면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며칠 전 복부 초음파 검사를 받았는데, 병원 원장에게 불려갔다. 간 초음파 검사를 다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잠깐 누워 기다리는 시간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간 기능에 이상이 생긴 걸까?’, ‘심각한 결과가 나오면 어쩌지?’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미 나의 마음은 지옥이었다. ‘죽음을 피하려 안간힘을 쓰는 동안 나는 이미 죽음을 맞이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인간의 모든 두려움은 죽음에서 기인하는 불안감이 아닐까 싶다.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나 낯선 곳 낯선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리고 섬뜩한 장면을 볼 때 두렵다. 내가 애착하는 물건이나 사람을 잃을 때 두렵다. 상실이고 죽음이다. 생명에 대한 애착은 죽음을 밀쳐낸다. 매일 매 순간 나의 것을 지키려 애를 쓰면서, 피하고 방어하고, 숨고 외면하면서, 더 큰 두려움을 만들어내고 결국 그 순간 나는 죽어가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난 십자가가 없는 거 같아요.” 한 수녀의 말이다. 그러면서 말하길 “어떤 소임이 주어져도 그냥 ‘끌어안아서’ 그런 것 같다”며 환한 미소를 보였다. ‘끌어안다.’ 능동적으로 자진해서 사람이나 물건을 두 팔로 당겨서 품는 것을 말한다. 단순히 포옹하기, 껴안기 혹은 품는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적극적으로 무엇이든 자진해서 가슴으로 품다 보니 어떤 일도 십자가가 되지 않고 오히려 행복하다는 고백처럼 들렸다. 수도자들에게 주어지는 소임이 있다. 어느 정도 익숙해질 만하면 다른 낯선 곳에 가서 생소한 소임을 ‘순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어쩌면 수도자가 져야 할 십자가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나이 들수록 ‘낯섦’은 두려움으로 작용한다. 두려움은 애착에서 오는 상실감이고 또 하나의 죽음이다. 살아온 날보다 죽음이 더 가까이 왔음을 의식할 때 찾아오는 불안감이기도 하다. 사실 죽을 것 같은 십자가를 막상 끌어안다 보면 십자가가 아닌 선물이 될 때가 있다. 나를 지키려고 십자가를 밀쳐내고 저항할 때 죽음은 시작되지만, 몸을 아끼지 않고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수용할 때 오히려 생명을 얻는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마태 10,39)이라는 진리를 너무 자주 잊고 살아온 것 같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1코린 15,36) 관념적으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였던 성경 말씀, 마음속 깊이 어딘가에 떨어져 죽어있다 꿈틀대고 살아 움직일 때가 있다. 십자가를 끌어안는 바로 그 순간일 것이다.


영성이 묻는 안부

샤를 보들레르의 ‘가난한 이들의 죽음’이란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위로도, 살게 하는 것도, 죽음.” 그러니까 살게 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거지요. 죽음은 “미지의 천국으로 열린 문”이라는 대목도 눈에 들어옵니다. 죽음은 ‘자신으로 존재하기에 탁월한 가능성’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최초 하느님이 창조한 고유한 ‘나’로서 존재하게 해주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우리 모두에게 죽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지요. 마지막 시간에 내가 가진 유일한 것은 작아지는 ‘몸뚱이’일 것이고요. 그렇기에 많은 것을 소유할수록 덧없는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가난은 죽음을 친구처럼 마주하게 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 같습니다. 사순 시기 나의 십자가를 밀쳐내기보다 끌어당겨 가까이 바라보면 어떨까요? 그러다가 죽음을 각오하고 끌어안아 보세요. 죽음이 또 나를 살게 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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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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