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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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칠레(상)- 칠레 원주민(?)으로 24년을 지낼 수 있었던 비결

낯선 땅 칠레에서 시작된 설렘과 두려움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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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레 선교사 초창기 때 한 가정을 방문해 병자성사를 주는 모습.

   저는 24년 된 칠레 선교사입니다. 그동안 칠레에서 사목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평화신문을 통해서나마 선교사로서 삶을 돌아볼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칠레에 온 것은 자의 반 타의 반이었습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영향이 절반이지요. 필리핀과 피지, 칠레 중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필리핀은 알았지만, 피지와 칠레는 어디에 붙은 나라인지도 몰랐습니다. 가장 먼 칠레를 선택한 것은 멀리 가보자는 선교사로서 소명의식과 젊은 시절 객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남미` 하면 해방신학이 떠오릅니다. 뭔가 대단한 삶의 실천운동들이 궁금했던 것도 칠레에 온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저희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사제가 되기 전 2년가량 현지 실습을 보냅니다. 실습을 보내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현지에서 생을 마감하기에 그곳 풍토와 음식 등이 맞는지 살피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언어 학습능력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지 주민이 경제적으로 열악하거나 학력이 낮거나 우리보다 덜 윤리적인 경우가 많은데, 그럼에도 그곳 주민을 평생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1993년에 사제품을 받고 처음 정착한 곳은 수도 산티아고의 라 핀타나(La pintana) 지역입니다. 현지 빈민사목 사제로 발령을 받았지요. 라 핀타나는 단순히 가난한 지역이기도 했지만, 마약 등 사건 사고로 뉴스에 우범지역으로 자주 등장하던 곳입니다. 택시기사도 밤에는 안 갈 정도입니다. 그래서 외부인들은 거의 출입할 수 없던 마을입니다.

 겁이 났습니다. 사목실습 때부터 명성(?)을 익히 들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호주에서 온 다니엘 신부님과 둘이 발령받았습니다. 어떻게 주민들과 친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다 둘이 꾀를 낸 결론이 태권도 교실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전단을 만들어 뿌렸더니 시작하는 날 7~18세 청소년 300명이 모였습니다. 저는 사실 태권도는 군대에서 배운 태극 1장이 전부였습니다. 마침 우리나라 한 기업체에서 칠레에 사원을 파견했습니다. 다행히도 그분이 태권도 유단자였습니다. 천주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우리와 함께 사는 것이 도움되겠다 싶어 태권도 수업을 해줬습니다.

 저는 그 태권도 사범이 "얍!"하고 무게를 잡으면 아이들에게 유단자보다 더 잘 하는 것 같은 환상을 심어줬습니다. 그랬더니 동네 깡패들이 저를 슬슬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에는 제가 태권도 고수인 것처럼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젊은이들에게 다가갈 좋은 기회가 됐습니다. 저도 무서움을 떨치고 사목할 수 있게 됐습니다.

 칠레는 동양인을 깔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일을 통해(물론 사제였기에 존경심은 있었지만) 덜 놀림 받으며 유명해질 수 있었습니다. `성룡`이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태권도를 배우는 아이들을 보러 엄마, 아빠들도 성당에 왔습니다.

 라 핀타나는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기에 돈을 벌거나 모으는 데 제약이 많았습니다. 주민 상당수가 마약에 찌들어 있었고, 또 마약 판매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저녁 때마다 마리화나는 기본입니다. 마약을 복용하며 삶이 피폐해졌습니다. 마약을 얻으려니 무슨 방법이든 가리지 않는 그들의 삶이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에이즈 환자들도 많았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와 언어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젊은이들이 조금 더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판자촌임에도 신도시처럼 길이 그물망처럼 잘 갖춰져 있었습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걸어가면 방향을 따라 길 이름이 남자 성인 이름이었고, 다른 방향으로 가면 계속 여자 성인 이름이었습니다.

 성인 이름인 길을 걷다 보니, 베드로길에서는 한국에서 만난 친구 베드로가 떠올랐고, 프란치스코길을 걸으면 같이 술을 마시던 프란치스코가 기억났습니다. 여러 사람을 방문할 때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고향 생각도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게 가정방문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말도 어눌하고 사람 만나는 일이 힘들었는데도 자투리 기쁨에 엔도르핀이 솟았습니다.

 사실 새내기 선교사가 그들 가정에 가보면 `아이들을 공부시켜야겠다` 혹은 `어떻게 해줘야겠다`는 열정이 넘칩니다. 내가 나서서 그들 처지를 개선해야겠다는 의지가 강합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허망할 때가 많습니다. 자녀를 위해 조언해도 부모가 반대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말을 타고 길을 가다 신자 주민과 이야기를 나누는 필자.
 
 
 칠레에서는 한국의 5일장처럼 요일장이 열립니다. 일주일 내내 장에서 일하는 15세 정도 되는 마음씨 착한 남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엄마를 도와 휘어진 못이라든지 잡지 등을 팔았습니다. 심성이 착한 아이를 돕고 싶어 몇 달간 관찰했습니다. 기술학교 1년 과정을 마치면 용접공이나 목수 등이 될 수 있는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 가서 부모에게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부모는 보낼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학교는 입학생에게 학비를 받지 않는 곳이었고, 한끼 점심과 통학 교통비 절반을 지원하는 좋은 조건을 갖춘 학교였습니다.

 그런데 아이 엄마가 더 가관이었습니다. 그 엄마는 "아이가 시장에서 나를 도와주지 않느냐, 아들을 학교에 보내면 나를 도와주는 만큼 돈을 내놓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돈 안 주면 아들을 데려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아이는 학교에 가지 못했습니다.

후원계좌 스탠다드차타드 은행 : 225-20-397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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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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