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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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과테말라(상)- 신나는 선교 배우기 하나

박효원(도르테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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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콰도르 주민들은 함께 버스를 타고 다니는 나를 동네 이웃으로 받아들여줬다.
사진은 마을 주민 로사 아주머니와 그의 어머니.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평신도 선교사로 해외에서 살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고생하시네요!"라고 첫 마디를 건넨다. "어떻게 그렇게 힘든 일을 하느냐?"며 치켜세워주는 분도 있다. 그럴 때마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기 힘들다. 많은 한국인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고생을 하며 선교활동을 하고 있지만 나는 고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곳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이들과 어울려 신나고 행복하게 살기 때문이다.

 선교사랍시고 첫 선교지인 에콰도르에 도착한 때가 1998년 봄 이었다. 바닷가 마을이었는데 어느 순간 보랏빛으로 물드는 석양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야자수는 바닷가에 늘어 서 있었고 장엄한 모습의 태평양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마을이었다. 한국과는 다른 이국적 풍경이 좋았다. 얼굴과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도 마냥 신나고 재밌었다.

 처음에는 현지 언어(스페인어)가 서툴러 재밌는 일을 많이 겪었다. 동네 주민들과 소통을 하기 위해 한서(스페인)사전과 서한사전 두 권을 들고 다녔다. 내가 하고 싶은 표현은 한서사전을 찾아 보여주고 주민들 손에 서한사전을 들려주고 말하고 싶은 내용을 찾아달라고 했다.

 소통은 사전 두 권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아침식사로 먹을 빵을 사러 빵집을 찾았을 때였다. 빵집에는 단맛이 나는 빵밖에 없었다. 사전은 빵이라는 표현밖에 없었다. 식빵을 사고 싶었다. 시간을 달리해서 가 봐도 도무지 식빵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다음날 단단히 마음을 먹고 빵집 앞을 지켰다. 한 시간여를 기다리자 동네 꼬마가 내가 원하는 빵을 사서 나왔다. 그 순간 빵집에 들어가 급한 마음에 한국말로 "저거, 저거"하면서 손가락으로 아이 빵봉투를 가리켰다.

 빵집 아저씨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뒤로 가서 화덕 옆에 있는 빵을 갖다 줬다. 아저씨는 빵 이름을 가르쳐 주곤 씩 웃었다. 따뜻한 빵을 팔려고 화덕 옆에 뒀던 것이다. 빵 이름을 외우고 또 외우면서도 불안했던 나는 빵을 늘 하나를 남겨서 다음날 빵집에 들고 가 보여줬고 아저씨는 씩 웃으며 빵을 줬다.

 슈퍼마켓이 없어서 시장에서 장을 볼 때면 계산이 큰일이었다. 사투리가 심한 지역이라 도무지 숫자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종이와 펜을 들고 다니며 장을 봤다. 과일을 원하는 만큼 집은 다음 동전을 가득 쥔 손을 펴서 아저씨가 알아서 가져라고 눈짓을 했다. 아저씨의 정직함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 첫 선교지는 태평양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마을이었다.
 
 
 무더운 지역이어서 미사 제대용 초는 항상 눅진하게 휘어져 있었다. 불볕더위 때문에 미사는 저녁에 드리는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새벽잠이 많은 내게는 행복한 아침이었다. 저녁 미사에 참례하러 집을 나서면 적도가 지나가는 태평양 바닷가의 아름다운 석양이 눈을 희롱했다. 미사시간이 될 때까지 아는 성가는 다 불렀다. 즐거울 때, 힘들 때, 기쁠 때, 우울할 때 바닷가에서 부르는 성가는 새로운 힘을 주었다.

 주민들이 그늘에 그물침대를 걸어놓고 쉬고 있는 모습을 보고 `게으르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나 역시 똑같은 모습으로 변해갔다. 주체할 수 없는 더위 속에서 청소라도 하면 일사병, 열사병 징후가 보인다는 핑계로 나 역시 그늘에서 쉬었다.

 더울 때는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하고 싶었지만 씻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물이 미지근하기도 했지만 엘니뇨 현상으로 인한 재해로 동네에 있는 다리가 무너지는 바람에 길이 끊겨 물차가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항상 물이 부족했다. 어마어마한 물(바다)이 바로 눈앞에 있지만 막상 식수로 쓸 수 있는 물은 어디에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

 다리가 복구될 때까지 물을 길어 와야 했다. 아니면 빗물을 받아 써야 했다. 숙소 물탱크는 관이 망가지면서 물이 대부분 새어나갔다. 믿을 수 있는 건 빗물뿐이었다. 물이 부족하다 보니 다른 곳에 쓰는 모든 물을 아껴 써야 했다. 빨래도 잘 하지 않게 됐다. 덕분에 그동안 물을 얼마나 낭비하면서 살았는지 배우게 됐다. 지금도 물이 흘러나오는 수도꼭지는 잠그고 다니는 버릇이 있다.

 버스를 타면서 동네 아주머니들과 수다도 많이 떨었다. 아이들과도 금세 친해졌다. 버스비도 서로 내주고 동네 소식은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다 알게 됐다. 누가 누구랑 친하고 누가 어떤 일이 있는지 알게 됐다. 가정방문을 할 때 이만저만 도움이 되는 게 아니었다.

 버스 안의 수다스러운 분위기 덕분에 스페인어 연습도 많이 하고 동네 사정도 속속들이 알게 됐다. 일거양득보다 더한 일거다득이었다. 주민들도 함께 버스를 타고 다니는 나를 동네 이웃으로 받아들이며 살뜰하게 챙겨줬다. 시집 못간(?) 노처녀라고 걱정도 해줬다. 음식을 넉넉히 만든 날은 불러서 밥도 먹여줬다.

 이곳 주민들에게 제일 좋은 음식은 닭고기다. 세 끼 식사를 전부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아침에는 밥과 닭튀김, 점심에도 밥과 닭튀김, 저녁에는 닭고기 볶음밥을 먹었다. 하도 닭고기만 먹다 보니 병아리가 뱃속에서 뛰노는 꿈을 꾸기도 했다. 선교지에서는 가끔은 불편한 일도 있고 짜증나는 일도, 한국이 그리울 때도 있다. 하지만 심심할 틈이 없다. 신명나는 행복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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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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