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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페루(중) 드디어 출동! - 박규식 신부(의정부교구)

말은 잘 못하지만 ''친절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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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 기간 중 주보 `기적의 주님`을 실은 가마를 어깨에 메고 기도와 찬양을 하며 바닷가에서 본당까지 순례하는 신자들.
 

 
▲ 마을 사람들과 함께하는 이곳 본당 축제는 한 달여 동안 계속된다.
사진은 축제 기간 중 페루 전통춤 마리네라(Marinera) 경연대회를 하는 모습.
 
 
신학교에서 5개월을 지내고 프란치스코회 신부님들과 5개월의 사목실습을 마친 뒤 페루에 온 지 10개월 만에 파이한(Paijan)이란 시골 동네 본당을 맡게 됐습니다. `아직 한참 부족한데 어떻게 하지?`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첫 본당에 도착했습니다.

 `깡` 없이 낯선 땅에서 살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깡`.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무언가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져온 짐과 마음의 짐을 그곳에 풀었습니다.

 동네 분위기는 어린 시절 살던 고향과 비슷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 서울 변두리 동네 분위기가 났습니다. 2만 5000여 명이 사는 마을이었는데 외국인은 저 혼자였습니다.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외딴곳에서 17대 1로 싸워야 하는 기분이랄까. 아무튼 막막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습니다. 하루하루 버벅댔지만 국방부 시계가 멈추지 않고 돌 듯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어려운 것은 스페인어로 해야 하는 강론과 고해성사, 신자들과 면담이었습니다.

 한 신자와 면담을 했는데 싸웠다고 말한 건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랑 싸웠는지는 못 알아들었습니다. 강론을 마치고 방 안에 홀로 앉아 그 신자와 대화를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주절주절 이상한 말만 한 것 같았습니다.

 1년 후 알게 된 일이지만 부임 초반에 신자 몇 분이 교구청에 투서를 했다고 합니다. 신부가 말도 잘 못하고 잘 알아듣지도 못한다고 바꿔달라고 했답니다. 신자분들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언어가 10개월 된 어린아이 수준이었으니까요.

 언어 장벽은 높았습니다. 하지만 말은 입으로만 하고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생각합니다. 마음을 열고 신자분들에게 다가가니 오래지 않아 신자분들이 저를 받아 주었습니다. 실마리는 바로 `인사`였습니다.

 미사 후 한국에서 했던 것처럼 성당 마당에서 신자들과 인사를 나눴습니다. 또 길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먼저 인사를 했습니다. 뜻밖에도 이곳 사람들은 그런 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먼저 인사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전 금세 이곳에서 `친절한 금자씨`가 아닌 `친절한 신부님`으로 알려졌습니다. 먼저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낮아지는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됐습니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가신 그분을 다시금 가슴에 품게 됩니다.

 이곳 사목은 한국과는 조금 다릅니다. 본당에 딸린 공소가 14개 있습니다. 평일에는 주로 본당에서 개인 미사(가족 미사, 주로 연미사)를 집전합니다. 우리 본당은 고정된 미사가 없습니다. 신자분들이 미사를 청하면 원하는 시간에 봉헌합니다.

 가톨릭 국가인 페루에는 제사 문화가 없습니다. 조상 기일이 돌아오면 연미사를 신청합니다. 그리고 손님들을 초대해 미사를 드립니다. 미사 후에는 가족, 손님들과 함께 음식을 나눕니다.

 그러다 보니 미사가 많을 때는 5대나 있지만 없는 날도 있습니다. 정말 많을 때는 한 달에 80대 정도 드린 적도 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바로 다른 미사를 집전하고 그 미사가 끝나면 또 다른 미사를 드렸습니다. 마치 미사 드리는 기계가 된 것 같았습니다.

 점점 지쳐가고 있을 때 언젠가 아는 수녀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났습니다. 수녀님은 "내가 만약에 사제가 되면 하루에 열 번이라도 기쁘게 미사를 집전하겠다"며 "신부님들이 미사를 너무 건성으로 봉헌하시는 것 같다"고 했던 말씀이 저의 안일한 마음에 채찍을 가했습니다. 미사를 집전할 때 신자들 응답도 없고 영성체도 한두 명밖에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정성껏 미사를 드리기 위해 마음을 다독입니다.

 페루는 모든 행사를 신앙과 연결시킵니다. 개교기념일에는 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과 미사를 드리고 마을 행사에도 참석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모든 것을 사제에게 축복받길 원합니다. 집, 자동차뿐 아니라 놀이터, 운동복, 우물, 밭 등등. 웬만한 동네 행사에 다 초대를 받아 축복을 합니다.

 성당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온 동네를 주름잡고 다니다 보니 이젠 온 동네 사람들이 저를 알아봅니다. 인사도 먼저 건넵니다. 그럴 때는 작은 기쁨을 맛봅니다. 이런 작은 기쁨들이 있기에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새로운 도전은 시련과 역경 속에서 그렇게 희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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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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