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
교구/주교회의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선교지에서 온 편지] 에콰도르<상> 귀뚜라미는 수녀들에게 "공공의 적"

김순덕 수녀(사랑의 씨튼 수녀회)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공소에 찾아가 아이들과 수업하고 있는 필자(가운데 모자 쓴 이).
 
   세상의 중심은 어디일까?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누구나 한 번쯤 궁금하게 여겼을 법하다.

 위도와 경도가 00.00.00점인 `Mitad de Mundo`(세계의 중심이라는 뜻)는 남미 에콰도르에 있다. 날계란이 무중력 상태가 되어 뾰족한 못 위에서도 우뚝 서는 곳이다. 에콰도르(Ecuador, 적도라는 뜻)가 `태양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유다. 에콰도르는 해발 4000m 이상의 높은 안데스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있기에 열대, 아열대, 온대, 한대 등 기후가 다양하다.

 햇병아리 선교사인 나는 2008년 4월 베드로 까르보에 첫발을 내디뎠다. 베드로 까르보는 1년 내내 뜨거운 태양아래 여름만 있는 동네다. 나를 포함한 선교사 4명은 수도 키토에서 차로 8시간 거리에 있는 이 시골마을에서 조그만 진료소와 이네셈(INESEM)이라는 장애인 특수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세상 중심에 선 이방인 선교사

 비가 오는 어느 날, 8시간 동안 차를 얻어 타고 안데스산맥 너머 키토에 있는 한국 영사관에 다녀와야 했다. 이곳 변호사가 진료소와 특수학교에서 일하려면 한국에서 공증을 받아온 자격증과 경력증명서를 다시 이곳 영사에게 확인을 받아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에서 가져온 자격증과 졸업장은 이곳의 금빛 찬란한 초등학교 졸업장과 비교해도 보잘 것 없어 보인다. 공증인(公證印)이 금빛으로 찍혀있고 붉은 도장이 선명해도 하얀 종이에 검은 글씨로 적힌 자격증과 졸업장은 폼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수녀원에 놀러온 세 살배기 코흘리개조차도 내 서툰 발음을 듣고 "나이가 몇 살이냐?"고 걱정스럽게 물어오는 게 현실이다. 선교지에서는 자격증이나 졸업장보다 아이에게도 귀를 기울이는 겸손함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 또 외국인 등록증을 만들기 위해 몇 시간을 큰 도시까지 운전해서 가지만 등록증을 만들 플라스틱 재료가 없으니 다음 주에 오라는 말을 근 6개월 동안 들으며 무한한 인내심을 키워야 한다.

 하지만 용감한 도전정신을 발휘해야 할 때도 있다.

 무서운 귀뚜라미(grillo)들! 우리는 귀뚜라미를 이렇게 부른다. 우기가 시작되면 들판과 숲에 있던 귀뚜라미들이 비를 피해 마을로 모여든다. 그러면 우리는 아이들 먹일 식량을 지키기 위해 귀뚜라미와 사투(?)를 벌인다. 처음에는 옷장에도, 화장실에도 귀뚜라미들이 기어 다니고 날아다녀 비명을 지르고 식은땀을 흘리며 수백 마리를 퇴치해야 했다. 그것들은 밤새 옷과 종이를 갉아먹고, 엄청난 식욕으로 음식물을 먹어 치운다. 하지만 수프를 더 달라고 그릇을 내미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용감한 전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 까르보 이네셈은 다울레지구에서 유일한 장애인 특수학교다. 그래서 대부분 학생들이 새벽 5시 30분에 말을 타고 집을 나서서 2~3번 버스를 갈아타고 오거나, 2~3시간씩 걸어서 학교에 온다. 아침을 거른 채 학교에 오기에 오전 10시쯤 점심을 먹어야 한다. 학교에서 식사를 하지 못하면 종일 굶은 채 집에 가서 저녁을 먹는다. 급식비는 하루 25센트지만, 학생들은 가난해서 돈을 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 수녀들은 날마다 인근 야채시장에 가서 전날 팔다 남은 야채를 얻어와 부족한 식량을 보충한다.


 
▲ 장애인 특수학교 이네셈 학생들.
학생들은 새벽에 말을 타고 집을 나서서 2~3번 버스를 갈아타고 오거나, 2~3시간씩 걸어서 등교한다.
 
 #빈 수프 그릇을 내미는 아이들

 오늘 점심은 묽은 옥수수 수프와 기름에 튀긴 바나나 두 조각이었다. 수프를 더 달라고 빈 그릇을 내미는 학생들을 마주할 용기가 내겐 아직 부족하다. 허기진 아이들을 실컷 먹이고 싶지만 주방 창고는 늘 비어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내게 귀뚜라미는 `공공의 적`이 되었다. 가난한 과부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의탁할 수밖에 없는 우리 심정을 하느님께서는 아시리라.

 미사는 근처에 있는 이시도라 아오라성당으로 봉헌하러 간다. 미사 중에 동네 개들이 자연스럽게 제단 위를 오가고 온갖 새들과 박쥐가 성당 안을 날아다닌다. 하느님께서 손수 빚으신 창조물들이 함께 찬미하는 모습, 참 평화롭다.
 여전히 주민들의 빠른 말은 알아듣기가 어렵다. 그래서 하루가 길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오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의 자비하신 섭리에 온전히 의탁하는 것뿐이다.

 때론 무력감에 막막함을 느끼지만, 선교지의 삶은 결코 내 힘으로 무소의 뿔처럼 홀로 일궈내는 것이 아님을 배우고 익힌다. 그래서 공동체가 십자가 앞에서 서로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격려할 수 있음은 큰 은총이다.
 우리는 내일도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리라!

원계좌:  신한은행 140-008-847729  예금주:씨튼선교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1-09-25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5. 1

시편 38장 23절
주님, 저의 구원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