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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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 이후 형성된 지대골 교우촌 새 보금자리

[공소(公所)] 21. 대구대교구 김천 평화본당 직지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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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천 평화본당 직지공소는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설립된 지대골 교우촌의 새 보금자리로 김천 일대 유서 깊은 신앙의 중심지였다. 직지공소 전경.

 

알빈 신부가 지은 직지공소는 회중들이 제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설계했을 뿐 아니라 다용도로 공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가운데 보를 없앴다. 직지공소 내부.

 


김천은 경상북도 남서부 지역의 중심 도시이다. 동으로는 칠곡군과 성주군, 서로는 충북 영동군과 전북 무주군, 남으로는 경남 거창군, 북으로는 상주와 구미시를 접하고 있다. 금오산과 황악산, 추풍령과 소백산맥의 삼도봉이 이 지역들과 경계를 이룬다.

김천(金泉)은 ‘금이 나는 샘’이 있어 생겨난 이름이다. 그 샘물로 술을 빚으면 맛과 향기가 좋았다고 한다. 김천은 신라 때 김산군에 속한 산간 촌락에 지나지 않았으나 조선 초기 역마 제도가 생긴 이후 교역 중심지로 발전했다.

김천 대항면 직지사 아래 직지 천변에 향천동(香川洞)이라는 마을이 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마을이라는 뜻이다. ‘지대골’로도 불린 이 마을은 조선 왕조 치하 박해시대 때부터 자리 잡은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향천, 곧 지대골은 조선 말기 충청도 황간군 황남면에 속했던 지역이다. 1914년 지천과 합천, 묘내, 방하치 마을이 통합돼 경북 김천군 대항면 향천동으로 개편됐다. 황악산에서 발원한 직지천이 마을을 관통하고 있어 조선 시대부터 이곳에는 옹기를 굽는 가마골이 많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천주교인 유배

김천 지역에 교우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부터이다. 「사학징의」에 따르면 충청도 덕산에 살던 천주교인 박춘산이 김천으로 유배됐다. 박춘산은 복자 정산필(베드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었다. 또 부산 동래에 살던 현계탁이 김천 증산으로 귀양왔다. 현계탁은 복자 현계흠(플로로)의 동생이다. 그는 천주교에 관여하지 않았으나 형의 일을 알고도 숨겨 감춘 죄로 유배됐다. 하지만 황사영이 1801년 10월 10일 심문에서 심문관이 “현계흠의 동생이 동래에 와서 머물렀던 것도 또한 사학 때문이었느냐?”고 물었을 때, 황사영은 “그렇다”고 대답한 것으로 보아 현계탁 또한 천주교인임이 틀림없다.

이처럼 김천은 신유박해 이후 신앙 때문에 유배 온 교우들에 의해 복음이 처음으로 전래됐다. 이후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이후 경기ㆍ충청ㆍ전라도 지역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경상도 북부 산간으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일구고 살았다. 또 1866년 병인박해 당시에는 김천에 살던 유시몬을 비롯한 6명의 천주교인이 충주 포교에 체포돼 순교했다. 병인박해 시기 김천 일대에 형성된 대표적인 교우촌이 김천 증산면 황점리 장자터, 장전리 선무터, 지좌동 마잠, 대항면 향천리 지대골, 봉산면 광천리 곤천, 남면 부상리 공소다.



고 김수환 추기경 부모 지대골에서 생활

김천 지대골 교우촌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고 김수환 추기경의 아버지 김영석(요셉)과 형인 고 김동한(가롤로) 신부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집안은 충남 논산군 연산의 양반 가문으로 천주교가 전파되던 초기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순교자 집안이다. 김 추기경의 할아버지 김보현(요한)은 1868년 연산에서 체포돼 한양 포청에서 옥중 순교했다. 김 추기경의 아버지 김영석은 경상도 사목을 담당했던 파리외방전교회 로베르 신부의 중매로 서중하(마르티나)와 혼인해 김천 직지사 아래 옹기마을인 지대골 교우촌에서 1919년 6월 김동한 신부를 낳았다. 김 신부는 열네 살 때 소신학교에 진학해 스물일곱 되던 1945년 12월 사제품을 받았다. 1951년 해군 군종 신부로 입대해 1958년 중령으로 예편했다. 제대 후 이듬해 마흔한 살에 그는 미국 유학을 떠나 뉴욕 포담대학과 성 요한대학에서 교육 철학과 교육 행정을 전공하고 1963년 석사 학위를 받아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대구대교구 경산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면서 처음으로 결핵 환자들과 연을 맺는다. 이후 그는 죽는 날까지 결핵 환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환자들을 돌보다 자신도 감염도 생명을 잃을 뻔도 했다. 그는 결핵 환자를 위한 요양원을 짓고 ‘밀알회’를 조직해 항구적인 후원 기반을 마련했다.

1983년 9월 28일 선종한 김동한 신부에 대해 동생 김수환 추기경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가난하고 병든 형제들을 꾸준히 돌보는 것입니다. 형님은 많은 분을 사랑하셨습니다. 또 많은 분으로 하여금 사람을 사랑하도록 하셨습니다. 형님 신부님은 당신을 사랑해 주는 것보다 당신 자신이 몸 바쳐 사랑하고 있는 환자들을 사랑하는 것을 더욱 기뻐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형님 신부님을 사랑하던 이들은 새롭게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형님은 이런 아름다운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일하시다가 밀알 하나가 되었습니다”라고 했다.(1주기 추모 강론)

 

 

지대골 교우촌 신자들은 새로운 공소 자리를 지금의 복전동에 마련했고, 1967년 성 베네딕도회 알빈 신부의 설계로 아담한 공소 건물을 지었다.

 


1967년 알빈 신부 설계로 직지공소 건축

또 병인박해 이후 형성된 지대골 교우촌에는 1890년대 말 순교자 후손인 서필수(마르티노) 가정과 박경하(토마스) 가정도 살았다. 1950년 김천본당(현 김천 황금본당)을 사목하던 최재선 신부가 지대골 교우촌 공소 건너편 초가를 매입해 임시 공소로 사용하면서 ‘직지공소’라 이름 지었다. 이후 1958년 김천 평화본당이 설립되면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사목을 담당했다. 지대골 교우촌 신자들은 새로운 공소 자리를 지금의 복전동에 마련했고, 1967년 알빈 신부의 설계로 아담한 공소 건물을 지었다. 바로 지금의 직지공소이다.

직지공소는 다용도 건물로 설계됐다. 전례와 기도 모임뿐 아니라 친교, 작업 공간으로 쓰일 수 있도록 최대한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가운데 보를 없앴다. 하지만 알빈 신부는 회중이 전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손색없는 전례 공간을 두었다. 정방형의 평면에 대각선을 축으로 공간감을 주었다. 제단 좌우에 3개의 수직 줄창을 두어 언제나 빛이 제대를 비추게끔 했다. 또 제단 벽의 수직 기둥을 노랑으로 색칠해 제단의 집중도를 높임과 동시에 내부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아울러 피라미드형 지붕과 종탑이 눈에 띄어 멀리서도 공소 건물을 알아보고 찾아올 수 있도록 했다.

직지공소 건축 당시 교우 수는 185명이었고, 한때 200여 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도시화에 따른 이농 현상으로 지금은 교우수가 급감해 그 명백만 유지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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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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