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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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전 지은 공소, 농산물 창고로 사용

[공소(公所)] 24. 대구대교구 평화본당 신암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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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천 평화본당 신암공소는 1964년 알빈 신부가 환갑 때 설계하고 지은 교회 건축물로 종탑 옆면에 입구를 내고 제단 옆 벽에 문을 내 부속 건물과 통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신암공소 내부는 단순하고 소박한 공간으로 설계됐으며 제대 뒷벽에 소실점을 만들어 회중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제대로 집중할 수 있도록 꾸몄다. 안타깝게도 신암공소는 교우수 감소로 공소 기능을 잃은 채 현재는 마을 주민의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가을바람고개(추풍령)는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과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사이에 있다. 해발 221m의 추풍령은 죽령, 조령, 이우릿재(이화령)와 함께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 4대 고개이다. 조선 시대 영남대로인 문경새재 이우릿재보다 규모는 작으나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가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다. 마음 약한 선비들이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낙방한다 해서 가을바람고개 남쪽 궤방령으로 돌아서 넘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추풍령 고갯마루에는 당마루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과거에 낙방한 선비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머물면서 생겨난 마을이라고 한다. 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당나라 군사가 이곳에서 머물렀다 해서 마을 이름을 당마루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울러 추풍령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장지현이 이곳에서 왜군 1만 명과 맞서 싸운 곳이기도 하다.

이 추풍령 고갯길을 사이로 대구대교구 김천 평화본당 신암ㆍ광천공소와 청주교구 황간본당 추풍령ㆍ매곡ㆍ천덕공소가 있을 만큼 가을바람고개는 유서 깊은 신앙의 보금자리이다. 이번 호에는 추풍령 아랫마을에 자리한 대구대교구 평화본당 신암공소를 소개한다.



병인박해 때 김천 지역에 교우촌 생겨나

김천 봉산면은 삼국 시대 김산현에 속한 고장으로 직지사 봉납물을 생산하던 곳이었다. 19세기 초ㆍ중반 이곳으로 숨어들어온 가톨릭 교우들은 옹기를 굽고 밭을 일구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특히 봉산면 신암리는 조선 시대 충청도 영동군 황남면에 속한 고도암, 신촌 마을로 서쪽에 인접한 매곡면 교우들뿐 아니라 황간 상촌 지방 교우들과 교류가 잦았다. 일제 강점기인 1917년 가성과 신기를 통합해 신암리라 했고, 김천군 봉산면 관내로 개편됐다.

경상도 지역에 가톨릭 신앙이 전파되고 복음이 선포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충청도 지역 교우들이 경상도 북부 지역으로 피신해 교우촌을 이루고 살면서부터라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당시 경상도에서 체포된 교우 대부분이 충청도 출신이었다.

김천 지방에 교우촌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박해 때이다.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경남 사천 등지에서 박해를 피해온 교우들에 의해 지금의 황점, 마구실, 장자터, 서무터, 마잠, 부상, 곤천이, 지대골 등의 교우촌이 생겨났다. 그리고 189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반 김천 봉산면 일대에 공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김천 지방의 선교는 초대 김천본당 주임인 김성학 신부에 의해 활성화됐다고 이미 소개한 바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대구대교구의 위탁을 받아 김천ㆍ상주ㆍ함창ㆍ점촌 등 왜관 북부 지역 본당 사목을 위임받은 후 1963년과 1964년 사이 김천 봉산면 일대에 3개 공소가 설립된다. 바로 봉산면 광천과 신암공소, 대항면 직지공소이다. 바로 함경도 덕원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다 공산군에게 체포돼 옥사독수용소 생활을 하다 추방된 후 한국에 재입국한 파비아노 담 신부가 김천본당 사목을 맡으면서다.


 

 

 

신암공소 내벽에 설치된 십자가의 길과 십자가 목걸이가 옛 공소의 정취를 느끼게 해 준다.

 


알빈 신부, 20년간 185개 교회 건축물 설계

“덕원으로 돌아갈 수 없고 남한에 정착해야 한다고 인식할 때부터 베네딕도회원들은 김천이 그들 선교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곳에서 주교가 나오리라 기대했다. 파비아노 담 신부를 바로 ‘그 사람’이라고 했다.… 파비아노 신부는 김천본당 반세기 역사에서 첫 유럽인 사제였다. 신자들은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그를 맞았다.… 파비아노 담 신부의 사목 활동에서 성당 건축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파비아노 신부가 현대식 성당, 강당, 학교를 건축한 것은 1930년대 원산에 이어 두 번째 필생의 사업이었다. 그는 먼 장래를 내다보며 큰 걸음을 내디뎠다.… 파비아노 신부가 기획한 것은 지금까지 한국에서 건축된 성당들을 뛰어넘는 형태였다.”(「분도통사」 1611~1616쪽 참조)

파비아노 담 신부는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독일 뮌스터슈바르작수도원에 있던 알빈 슈미트 신부에게 김천 평화성당 설계를 맡겼다. “알빈 신부가 독일에서 설계한 김천 평화성당은 현대식 성당의 모델이다. 성당을 보려고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바야흐로 남한 선교 사업이 큰 성공을 거두어 알빈 신부는 1964년 올 한해 10개의 성당을 설계했다. 이곳(평화성당)은 다른 모든 설계의 표본을 제시하는 그의 선구적 업적이다.”(김영근 베다 신부가 작성한 ‘김천본당 연대기’ 1961~1964년 36쪽 참조)

알빈 신부는 김천 평화성당 설계를 계기로 한국 선교사로 1961년 입국하게 된다. 알빈 신부는 1958년 김천 평화성당을 시작으로 1978년 선종할 때까지 20년간 한국에서 122개 성당과 공소를 비롯한 185개 교회 건축물을 설계했다. 알빈 신부가 설계한 교회 건축물이 지금까지 호평을 받고 있는 것은 성당의 본질인 전례 공간으로서의 요소를 충실히 구현했기 때문이다. 그는 회중들이 자연스럽게 제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설계했고, 단순하고 소박한 공간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느낄 수 있도록 자연 채광을 통해 성당 내부를 환하고 평온하게 했다.



교회 건축물로 제 모습 되찾는 날이 오길

김천 봉산로 514에 자리한 신암공소는 1964년 알빈 신부가 환갑일 때 설계하고 지은 교회 건축물이다. 알빈 신부는 김천, 구미, 왜관 등지에 30여 개 공소를 설계했다. 공소 교우들의 사정에 맞게 주로 30~40평 규모의 건물을 지었다. 신암공소는 장방형 시멘트벽돌조 건물로 종탑 옆면에 입구를 내고, 제단 옆 벽에 문을 내어 부속 건물과 통할 수 있도록 했다. 제단은 감문과 개령공소처럼 양옆으로 벽으로 쌓아 폭을 좁히고 제대 뒷벽에 소실점을 만들어 자연스럽게 시선이 제대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또 공소 건물 네 면 모두에 창을 내어 채광을 밝게 했다.

현재 신암공소는 공소 기능을 상실한 상태다. 교우수 감소로 공소 건물은 현재 주민이 임대해 사용하고 있다. 공소 건물은 농산물 창고가 됐고, 부속건물은 가정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고물이 보물이 되고, 낡은 것이 유적이 된다’는 말이 있다. 신암공소가 교회 건축물로 제 모습을 되찾는 날이 하루빨리 오길 기대한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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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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