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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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주민 모두가 천주교 신자인 신심 깊은 교우촌

[공소(公所)] 43. 전주교구 신태인본당 신기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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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신태인본당 신기공소는 조선 왕조 치하의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산속에 피신했던 교우들이 평지로 내려와 일군 교우촌이다. 신기공소 전경.

전주교구 신태인본당 신기공소는 전북 정읍시 태인면 거산신기1길 101에 자리하고 있다. 신기(新基)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다. 우리말로 ‘새 터’이다. 정읍과 태인 지역의 교우촌 대부분은 깊은 산 속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신기공소는 이들 교우촌과 달리 너른 벌판 한가운데 양지바른 곳에 터를 잡고 있다. 신기공소가 이렇게 거산리 벌판에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박해 시기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를 얻어 산속에 있던 교우들이 평지로 내려와 교우촌을 형성해 마음 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해 시기 끝나고 거산리 벌판에 자리

19세기 말 한불 수호조약으로 조선 왕조 치하의 가톨릭교회 박해가 끝났지만, 전라도 교우들은 가난을 면치 못했다. 그들은 극도의 가난으로 다른 주민들보다 또 다른 지역 교우들보다 더 자주 이사를 했다. 삶 터를 바꾸면서 이젠 좀 덜 어렵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보지만, 교우들의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전라도의 교우들은 모든 이가 그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아주 아무것도 없는 형제자매들에게 도움을 줄줄 알았고, 과부와 고아들을 거두어 줬다. 그들은 교우촌 안에서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이 불행한 시절보다 우애가 더 깊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서로 격려했다.(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16쪽 참조)

이처럼 우리 신앙 선조들은 비록 가난했지만, 세상의 부를 쫓지 않고 자신들의 삶 터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기쁨을 맛봤다. 박해 시대 우리 신앙 선조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집을 짓고 살기 희망했는지 천주가사 ‘피악수선가’는 잘 알려준다. “집을 짓세 집을 짓세 천당따라 집을 짓세/ 이리저리 지을경영 규구대로 마련하여/ 교우들의 일심역사 삼본요리 터를닦아/ 십계로 기둥박고 신덕으로 중방넣고/ 망덕으로 도리얹고 애덕으로 대량삼아…/ 성사칠적 벽맞추고 조만과로 창호내고/ 신공으로 마당닦고 경덕으로 뜰을싸며/ 삼종으로 양식삼고 모든성경 곶집삼고/ 진복팔단 병풍하고 연옥도문 자리하며…/ 십자가로 대문달아 사마잡귀 물리치고/ 천주실의 비를삼아 허사망념 쓸어내고…/ 집을하나 지었으니 농업인들 없을소냐/ 양심으로 밭을삼고 성정으로 농기삼고…/전후좌우 모든교우 일심삼아 화목하세/ 세속에 없던부모 여기오니 새로있고/ 세속에 없던형제 여기오니 허다하고/ 세속에 적은친구 여기오니 무수하고/ 세속에 드문물건 여기오니 무진하다.(피악수선가 避惡修善歌 중에서)
 
신기공소는 한국인 성직자들이 자치 교구를 운영하던 전라북도 감목대리구가 설정된 직후에 1935년 형성된 교우촌으로 1958년에서야 비로소 공소 건물을 지었다. 옛 공소의 자취가 남아 있는 신기공소 내부.

웃동구네 교우들 이주하면서 교우촌 형성

1934년 태인면 웃동구네(上洞口) 서쪽에 마을 하나가 새로 생긴다. 웃동구네에 살던 천주교인 곽수영ㆍ정상옥ㆍ정장원씨 가족이 함께 이곳에 이주해 교우촌을 이뤘다. 그 뒤 웃동구내의 김중현이 이주하면서 주변 친척들과 교우들이 연결돼 1939년 다섯 가구가 입주했다. 사람들은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해서 지역 사투리로 ‘새라호뜸’이라 부르다가 새 터의 한자음인 ‘신기’가 마을 이름으로 정착했다.

신기교우촌이 형성될 당시 전라북도는 한국인 성직자들이 자치하는 감목대리구가 막 시행되고 있었다. 베네딕토 15세와 후임 비오 11세 교황은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하고 그들이 자치하는 교계제도를 구축하라는 선교 방침을 선교지 교회에 제시했다. 이에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는 교황의 선교 방침에 따라, 1931년 5월 10일 한국인 성직자들이 자치하는 ‘전라도 감목대리구’를 설정하고 초대 감목대리로 김양홍 신부를 임명했다. 드망즈 주교는 이후 1934년 3월 전라도 감목대리구를 전라북도ㆍ전라남도 감목대리구로 나누고 전라북도는 한국인 성직자에게, 전라남도는 골룸반외방선교회에 자치를 맡겼다.

전라도 자치 교회는 기대와 달리 초기부터 크게 두 가지 어려움을 겪는다. “첫째 문제점은 한국인 신부들의 자세이다. 한국인 신부들은 전교 정신의 결함으로 기성 신자들만을 대상으로 사목할 뿐 외교인의 개종에는 전혀 힘을 쓰지 않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한국인 신부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였다. 한국인 신부들은 민족주의 입장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을 불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문제점은 교구 운영의 재정적인 문제이다. 이것은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천주교 전주교구사 1」 787-788쪽 참조)
 
신기공소는 마을 주민 모두가 교우일 만큼 신심 깊은 마을로 알려졌고 지금도 성체 조배를 하며 일과를 시작할 만큼 열심한 교우들이 공소를 지키고 있다.

모든 교우 노력 봉사로 신기공소 건립

이런 상황 속에서 신기공소 교우들은 1950년대 말까지 변변한 공소 건물 하나 없이 교우들 가정마다 돌아가면서 주일 첨례를 지키며 신앙생활을 유지했다. 신기공소는 6ㆍ25 전쟁 때 정읍과 태인면 일대 산골 교우촌 교우들이 인민군과 빨치산을 피해 피난 와 정착하면서 55가구 300여 명이 사는 큰 마을로 변했다.

이에 공소 건물의 필요성을 느낀 교우들은 박상규(바르톨로메오)씨가 1157㎡(350평) 땅을 희사하면서 1958년 1월 공소를 짓기 시작했다. 본당 주임 이대권 신부로부터 공소 건립비 일부와 자재를 지원받은 신기공소 교우들은 직접 노력 봉사를 해 공소를 지었다. 남자들은 지게로, 여자들은 대야로 흙을 퍼다 논을 메꿔 터를 쌓고 건물을 올렸다. 농한기 4개월 동안 모든 공소 교우들의 희생과 수고 끝에 그해 4월 공소 건물이 완공됐고, 제3대 전주교구장 김현배 주교가 방문해 축성했다. 김 주교는 신기공소 수호성인으로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를 선포했다.

신기공소는 모든 주민이 천주교인인 교우촌이라 지금도 신심 깊은 마을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이에 대한 교우들의 자긍심도 대단하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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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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