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기관/단체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교회사 공개대학②] ''1815년 을해박해 순교자Ⅱ''

방상근 석문 가롤로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1815년 을해박해는 △지역적으로 경상도에 한정된 국지적 박해였고 △박해 원인이 정치적 이유보다는 기근과 같은 경제적 어려움에 따른 배교자의 밀고에서 기인했으며 △박해 규모가 크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을해박해 순교자 가운데 김윤덕(아가타 막달레나, ?~1815)은 경상도 상주 은재(경북 상주군 이안면 저음리) 태생으로, 연풍고을 안배에 사는 김씨와 혼인해 순득(운빈)을 낳았다. 장성한 뒤 고향 인근에 전해진 복음을 듣고 입교, 훗날 노래산 교우촌(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으로 이주했으나 1815년 부활대축일을 지내던 중 체포돼 경주로 압송됐다. 당시 관헌이 "너같이 무식한 자가 어떤 생각으로 죽으려 하느냐?"는 질문에 "아무리 비천하고 무식하다고 하더라도 조물주이신 천주님 은혜를 모를 수 있겠으며 그분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며 용기있게 답변했다. 그러나 대구로 이송돼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한 뒤 석방돼 막 대구감영 문을 나서던 중 안동에서 이송돼 오던 김종한에게서 "지금 훌륭한 죽음을 맞을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권면하는 말을 듣고 다시 관장 앞에 나서 신앙을 고백한 뒤 `살점이 떨어지고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하게 매질을 당하고 옥중에서 숨을 거뒀다.

 같은 노래산 교우촌 출신인 서석봉(안드레아, ?~1815) 순교자는 언제 어디서 출생했는지, 언제 신앙을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과부 구성열과 혼인한 뒤 사위인 최봉한 부부와 함께 청송 노래산으로 이주해 신앙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1815년 부활대축일을 지내던 중 체포돼 경주로 압송됐다가 아내, 사위와 함께 대구로 이송, 형벌을 받았고 신앙을 고수하며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중 옥중에서 순교했다.

 역시 노래산 교우촌 출신인 구성열(바르바라, ?~1816)은 원래 충청도 홍주 한내장벌(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에서 태어나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입교했으나 첫 남편과 사별하고 서석봉과 재혼한다. 부부는 사위 최봉한 부부와 함께 청송 노래산으로 이주했으나 역시 1815년 부활대축일에 체포돼 경주로 압송됐고, 이듬해인 1816년 12월 19일 참수됐다. "비록 그는 여자의 몸이었지만 마음의 강직함은 결코 남자에 뒤지지 않았고 몸을 온전히 바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찬란하게 증거할 줄 알았다"는 훗날의 평가가 오늘까지도 전해진다. 그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됐다가 1817년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이장됐다.

 충청도 홍주 다락골(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태생인 최봉한(프란치스코, ?~1815)은 서석봉ㆍ구성열의 사위로 입교 뒤 공주 무성산으로 이주했으나 주문모 신부 입국 소식을 듣고 모친, 누이와 함께 상경한다. 모친이 성사와 병자성사를 받고 얼마 뒤 사망하자 누이를 정약종의 집에 머물게 하고 시골로 내려간 그는 서석봉의 딸과 혼인, 장인 부부와 함께 청송 노래산으로 이주했다. 역시 1815년 체포돼 천주교 우두머리로 지목돼 의식을 잃은 적이 여러 차례 있을 정도로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그의 놀라운 열의와 용기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되는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1815년 5월께 옥사했다.

 고성대(베드로, ?~1816)ㆍ성운(요셉, ?~1816) 형제는 충청도 덕산 별암(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 태생이다. 형은 본래 성격이 포악해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를 꺼렸으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격이 바뀌었다. 동생은 본래 성격이 착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다. 언제나 합심해 성경을 읽고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적 권면을 하는 데 열심이었으므로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됐다. 다만 한때 고산 저구리(전북 완주군 운주면 적오리)로 이주했던 형은 1801년 전주 포졸에게 체포된 뒤 처음엔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다가 목숨을 보존해 주겠다는 유혹에 넘어가 석방됐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우와 함께 청송 노래산으로 이주했다. 1815년 부활대축일 때 체포돼 경주로 압송된 형제는 대구로 이송돼 형벌의 고통을 참으며 기꺼이 신앙을 증거했다. 당시 죽기로 먹은 마음이 목석과 같았고, 고통과 궁핍에도 항상 기쁨 안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816년 12월 19일 참수됐다.

 끝으로 충청도 청양 수단이(충남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 태생인 김화춘(야고보, ?~1816)은 본성이 온순하고 참을성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전주에서 순교한 김대권(베드로)의 동생이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배워 입교한 그는 장성한 뒤 교회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키며 기도생활과 성경 읽기에 부지런해 교우들의 주목을 받았으나, 1815년 체포돼 경주를 거쳐 대구로 이송돼 1816년 10월 21일 참수됐다.

  정리=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3-10-13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5. 18

시편 19장 9절
주님의 규정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은 맑아서 눈에 빛을 주도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