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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공개대학④] 원주ㆍ대구의 기해년(1839) 순교자

백병근(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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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유박해를 거치며 한양 등지에 살던 천주교 신자들이 지방으로 내려간다. 서울과 경기, 충청, 전라 지방에 이어 경상과 강원 지방으로까지 천주교 신자들의 이주가 확산됐다. 박해를 피해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원주 지역은 숨어살기에 용이했다. 박해를 피해 숨어살 곳을 찾던 신자들, 특히 서울과 경기, 전라 북부 신자들은 지형적으로 산지가 많은 강원도로 이동하던 중 원주와 횡성에 정착했다. 이재의나 정분이, 신태보, 김강이 등이 대표적이다. 원주 지역 천주교 전래는 1784년 조선에 천주교가 수용된 이후 일어난 박해를 피해 이주한 사람들에 의해 이뤄졌다.

 반면 경상 지역 이주는 충청도 남부와 전라도 북부에 퍼져 있던 신자들이 경상 북부와 남부 산간에 정착하며 이뤄졌다. 청송 노래산 교우촌(경북 청송)과 진보 머루산 교우촌(경북 영양), 영양 곧은정과 우련밭 교우촌(경북 봉화) 등이 대표적 정착지였다.

 우선 1839년 기해년 원주 지역 박해로 순교한 하느님의 종으로는 최해성(요한, 1811~39)과 최 비르지타(1783~1839)가 있다.

 충청도 홍주(현 홍성) 다락골 출신으로 `양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 최해성은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7촌 사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조부가 체포돼 다락골로 유배되면서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운 그는 온순하고 정직한 성품이었으며, 훗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원주 서지(현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2리)로 이주해 작은 교우촌을 이룬다. 그의 덕행에 감동한 선교사가 그를 마을 회장으로 임명했고, 견진성사를 받은 후에는 성령칠은의 특은을 받은 징표가 나타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1839년 초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부모와 가족을 좀 더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뒤 교회서적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집으로 가던 중 체포돼 무려 21차례에 걸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다리뼈 두 대가 부러져 두세 치 되는 뼛조각이 두 개나 땅에 떨어졌고 몸에 더 이상 몽둥이를 댈 곳에 없을`(다블뤼 주교 「조선 순교사 비망기」) 정도였다고 한다. 배교의 유혹을 물리친 채 1839년 9월 6일이나 10월 6일 원주에서 29세를 일기로 참수된다.

 최해성의 고모인 최 비르지타는 1801년 남편 유씨가 황사영(알렉시오)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자 남편을 따라 유배지로 갔다. 이어 남편이 임종하자 그는 자신의 오빠(최해성의 부친)가 살고 있는 서지로 와 정착했다. 그가 체포된 것은 1839년 음력 8월로, 원주 감옥에 갇힌 조카 최해성을 보러간 게 빌미가 됐다. 원주 영장은 그를 감옥에 가둬 두고 굶어죽게 내버려뒀지만 4개월이나 버티자 다시 명령을 내려 교살시켰다. 목에 차고 있던 칼을 조여 죽이는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대구의 기해년 순교자는 이재행(안드레아, 1776~1839)과 박사의(안드레아, 1792~1839)ㆍ김사건(안드레아, 1794~1839) 등 3위로, 이들은 모두 1839년 5월 26일 대구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종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 이재행은 20대에 가족과 함께 입교, 재산과 고향을 버리고 산속에 은거하며 신앙생활을 했는데 뛰어난 덕성으로 사방에서 찬사를 받았다. 1827년 정해박해 때 순흥 곰직이(현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서 체포돼 안동으로 끌려간 그는 대구관아로 이송돼 수감 중 처와 자녀들의 사망소식을 듣는 가운데서도 굳게 신앙을 지키다 순교했다.

 이재행과 같은 홍주 출신인 박사의는 지극한 효심을 지녔던 인물로, 단양 가마기(현 충북 단양군 적성면 하리의 `가마동`으로 추정)를 거쳐 1827년 봄 상주 멍에목(현 경북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으로 이주한다. 그해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가 체포돼 상주 관아를 거쳐 대구 감영으로 이송됐으며, 심문을 받으면서도 효심이 지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굳은 신심으로 감옥생활을 견딘 그는 이재행과 함께 순교한다.

 충청도 서산 천주교 집안 출신인 김사건은 큰아버지 김강이(시몬)와 아버지 김창귀(타대오)가 입교하면서 재산과 종을 버리고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자 함께한다. 이어 1801년 신유박해 때 진보 머루산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강원도(현 경북) 울진으로 가서 정착했다. 1815년 을해박해 때 옛 하인의 밀고로 큰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체포됐으나 아버지가 유배형을 받은 뒤 김사건은 나이가 어려 석방되자 경상도로 이주한다.

 그는 천주교 서적과 성물 보급, 전교에 힘썼으며, 1827년 정해박해 때 체포돼 상주, 대구, 전주를 거쳐 다시 대구로 돌아와 체포된 지 12년 만에 순교했다.

   정리=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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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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