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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공개대학⑥] 전주의 기해박해(1839년) 순교자Ⅱ

백병근(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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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대가 순교한 집안도 있다. 홍낙민(루카, 1751~1801)을 시작으로 홍재영(프로타시오, 1780~1840), 홍봉주(토마스, 1814~66)와 심소사(바르바라, 1813~39) 부부, 홍봉주의 아들까지 4대가 순교하는 기막힌 일도 벌어졌다.

 이 가운데 기해박해 당시 전주에서 순교한 이는 충청도 예산의 유명한 양반 집안 출신인 홍재영이다. 홍낙민의 셋째 아들로 충주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성장한 그는 부모 입교 당시에 함께 입교했다. 성장한 뒤 동료들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교리를 연구하고 교회활동에 참여했던 그는 신유박해(1801년) 때 체포됐으나 배교 뒤 광주로 유배됐다. 하지만 유배지에서 몇 년간 냉담한 뒤 다시 신앙을 되찾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과 「조선 순교사 비망기」는 그의 신앙생활을 이렇게 전한다.

 "그는 모든 기도를 정확히 바쳤으며, 묵상에 전념하면서 하루 24시간 중에 잠과 휴식에는 겨우 몇십 분만을 할애했다. 그는 기도를 할 때면 항상 십자고상 앞에서 겸손하게 무릎을 꿇은 자세로 했으며, 게으르거나 무기력한 태도를 결코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무릎에 커다란 종기가 생겼다. 그는 일주일에 세 차례 금식했고, 항상 통회로 감정이 고조되곤 했다. 자선사업에 전념하기를 갈망하던 그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알게 되면 무언가를 몰래 가져다 줬고 그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직접 가기도 했는데, 여러 차례 현장에서 들켜 선행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기해박해(1839년)가 일어나면서 그는 피신하는 교우들에게 은신처를 알선 제공하다가 체포돼 전주로 끌려갔으며,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다가 1840년 1월 4일 전주형장에서 참수됐다. 그의 나의 60세였다.

 홍재영의 며느리인 인천 양반 집안 출신의 심소사는 이에 앞서 1839년 11월 11일 전주 옥중에서 병사했다. 신앙심이 누구보다 높았던 그는 남편 홍봉주와 함께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다가 두세 살 된 어린 아들 홍 베드로와 함께 체포돼 옥에 갇혔으나 위협적인 심문과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순교의 화관을 썼다. 아들 홍 베드로 역시 같은 날 사망했다. 남편 홍봉주는 1866년에 순교했다.

 김소사(아나스타시아, 1789~1839)ㆍ이봉금(아나스타시아, ?~1839) 모녀도 차례로 순교했다. 충청도 덕산의 양인 집안 출신인 김소사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해오다가 19세에 이성삼(바오로)과 혼인한 뒤 이웃에게 신앙을 권면하는 데 노력하던 중 정해박해(1827년)가 일어나자 전라도 장성으로 이주했다.

   장성으로 이사한 뒤 딸 이봉금을 낳고 선교사를 집에 모시는 행운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 때 홍재영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체포돼 전주로 이송됐고, 1839년 10월께 옥중에서 순교했다. 10세에 교리문답 전부와 아침, 저녁 기도문을 모두 배우고 첫 영성체를 했던 이봉금은 어머니와 함께 체포돼 전주로 끌려가 옥중에서 교살됐다.

 1801년 여주에서 순교한 최창주(마르첼리노, 1749~1801)의 딸 최소사(바르바라, 1790?~1840)는 18세 때 신태보(베드로)의 아들과 혼인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을 잃고 시아버지 곁에 머물렀다. 1827년 신태보와 같이 체포됐으나 배교 없이 석방됐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홍재영의 집에 은신해 있다가 체포돼 1840년 1월 4일 참수됐다.

 금산 고을 천주교 집안 출신인 이소사(막달레나, 1808~1840)는 15세 때 김성서(프란치스코)의 아우와 혼인했으나 20세가 채 못돼 과부가 돼 시부모를 봉양하며 살았다. 역시 홍재영의 집에 피신해 있다가 체포돼 1840년 1월 4일 전주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옥중에서 이소사가 교우들을 권면하던 일화가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을 통해 오늘에도 전해진다.

 "무엇보다 천주님과 더불어 솔직하게 행동합시다. 그분께 충실해 모두 함께 천국에 올라갑시다. 하나도 빠지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

 끝으로 충청도 은진고을 양반 집안 출신인 오종례(야고보, 1821~1840)는 어려서부터 교리를 실천하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혼인 뒤 전라도 고산에서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진산에 살던 맏형을 보러갔다가 1839년 7월 형과 함께 체포돼 전주로 끌려갔다. 19세 어린 나이에도 갖가지 형벌을 이겨냈으나 형이 배교하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마침내 1840년 1월 4일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았다.

   정리=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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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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