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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공개대학⑦] 병인박해기(1866년)Ⅰ- 서울ㆍ경기ㆍ충청도 순교자

양 인 성(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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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해의 배경을 보자. 1846년 병오박해 이후 선교사들은 교회 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신학교를 세워 신학생을 양성하고, 출판사를 설립해 교리ㆍ신심서를 간행했다. 선교사들도 꾸준히 조선에 입국, 1847년에서 1866년 사이 조선에서 활동한 성직자는 모두 18명이나 됐다. 교회체제가 정비되면서 신자 수는 1만 8035명, 1865년에는 2만 3000명에 이르렀다.

 국제 정세도 한몫했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연합군이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켜 베이징을 함락하고, 러시아는 전쟁 당사국 간 조약 체결을 주선한 대가로 시베리아 동부 연해주를 차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접경하게 됐다. 이후 러시아인들이 자주 국경을 침범하면서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은 당혹스러워하며 러시아의 요구를 물리치고자 오랑캐로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선택했다. 이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프랑스 선교사들과 접촉을 시도했고, 김계호(토마스)와 홍봉주(토마스) 등은 러시아를 물리치기 위한 방아책(防俄策, 아라사 곧 러시아를 막기 위한 방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의 위협이 사라지고 중국에서 서양 선교사들을 처형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대원군은 태도를 바꿔 박해에 들어간다.

 병인박해는 1866년 2월 최형(베드로)과 베르뇌 주교, 홍봉주 등이 체포되면서 막을 올렸다. 이 박해로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12명 가운데 9명이 순교했고, 리델ㆍ페롱ㆍ칼레 신부는 중국으로 피신해야 했다. 소강 상태를 보이던 박해는 1866년 9월 프랑스군의 침입, 곧 병인양요와 1868년 5월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사건(덕산사건), 1871년 미국 군함이 일으킨 신미양요로 격화됐다. 그러다가 1873년 12월 24일 고종의 친정체제가 시작되면서 오랫동안 계속된 박해가 막을 내렸다. 이 박해로 전국에서 8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느님의 종 125위 가운데 병인박해기 서울 순교자는 송 베네딕토(1798~1867)ㆍ송 베드로(1821~1867)ㆍ이 안나(1841~1867) 등이 있다. 충주 서촌(현 충북 음성군 금왕읍ㆍ삼성면ㆍ대소면ㆍ맹동면ㆍ감곡면ㆍ생극면 일대)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송 베네딕토는 진천 배티교우촌으로 이주했으나 1867년 배티에서 경포(한양 포졸)들에게 체포돼 아들 송 베드로, 17세 딸, 며느리 이 안나 등과 함께 진천과 죽산 관아를 거쳐 한양으로 압송돼 순교했다.

 죽산 지역 순교자로는 박경진(프란치스코, 1835~1868)과 오 마르가리타(?~1868)가 있다. 부부인 두 사람은 본래 청주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으나 박해가 일어나자 아들 4형제와 함께 진천 절골(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로 이주, 2년 동안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나 1868년 다시 박해가 일어났고, 그해 9월 5일 죽산 포졸들에게 쫓겨 피신하던 중 오 마르가리타와 어린 자식, 박경진이 차례로 체포돼 죽산 관아로 압송돼 그해 9월 28일 순교했다.

 청주 순교자로는 오반지(바오로, 1813~1866)가 대표적이다. 충청도 진천 반지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집안 출신으로, 장성할 때까지는 공부와 담을 쌓았고 혼인한 뒤에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날렸다. 그가 세례를 받은 건 40세가 훌쩍 지난 1857년에서 1858년께로, 이때부터 그는 아주 성실한 사람이 됐다고 전해진다. 1858년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고자 진천 지장골(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로 이주, 교회 가르침에 따라 가난을 참고 견디며 신앙의 본분을 지켰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청주 병영에서 파견된 포졸들에게 체포돼 진천 관아를 거쳐 청주로 이송됐다. 청주 병영에 이송된 오반지는 모진 형벌과 문초에도 교회 일을 누설하지 않고 충실하게 신앙을 지켰고 그해 3월 27일 목이 졸려 순교했다.

 또 청주 출신 순교자 장 토마스(1815~66)는 장주기(요셉)의 6촌으로,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나 장주기와 함께 입교했고 여러 곳을 떠돌다가 진천 배티에 정착했으며 1866년 청주 포졸들에게 잡혀 청주 장기대(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장대)로 끌려가 순교했다.

 공주 순교자는 충청도 진천 발래기(충북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 출신 김원중(스테파노, ?~1866)이 있다. 1866년 청주에서 순교한 김선화(베드로)의 사촌인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천주교를 진심으로 믿고 따랐으나 1866년 11월 11일 체포돼 25일간 갇혀 있다가 공주로 압송돼 그해 12월 16일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정리=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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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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