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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공개대학⑨] 병인박해기 경상도 순교자(Ⅱ)와 1888년 순교자 윤봉문

양 인 성(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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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종 125위 가운데 경상도 상주 지역에선 병인박해기에 박상근(마티아, 1837~67)이 순교했다. 경상도 문경에서 아전을 지낸 그는 중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착실히 교리를 지키며 살았다. 1866년 3월 예비신자였던 자기 자형과 함께 한실 교우촌(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상내리)에서 칼레 신부를 만나 문경 읍내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모셨고 사흘 뒤 다시 칼레 신부가 한실 교우촌으로 되돌아가기까지 함께했다. 얼마 뒤 홍 마리아,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돼 상주로 끌려간 그는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천주교를 믿는다고 분명히 고백했으며 함께한 교우들을 권면하다가 1867년 1월 옥중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대구에선 신석복(마르코, 1828~66)과 박대식(빅토리노, 1812~68)이 대표적이다. 경상도 밀양 명례(경남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에서 살았던 신석복은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중 천주교에 입교해 10년간 신앙생활을 했다.
1866년 창원 마포로 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오 야고보 등과 함께 김해 가산(김해시 한림면 가산리)에서 대구 포졸들에게 체포돼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며 1866년 3월 31일(또는 3월 18일)에 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경상도 김해 예동(김해시 진례면 시례리) 출신인 박대식은 천주교에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나 1868년 대구에서 온 포졸들과 김해 포졸들에게 체포돼 1868년 10월 12일 조카와 동료 2명과 함께 대구 형장으로 끌려가 참수형을 받았다.

 함안 순교자로는 구한선(타대오, 1844~66)이 있다. 함안 미나리골(경남 함안군 대산면 하기리) 중인 집안에서 출생한 그는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게 된 후 신앙의 길로 들어섰다. 교리를 배운 뒤 다블뤼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이후 10년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리델 신부의 복사가 돼 거제도 선교에도 동행하기도 했다. 1866년 리델 신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지내던 중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돼 그곳 관아로 압송됐으며 모진 형벌을 받은 뒤 석방돼 집으로 돌아왔으나 7일 만에 죽었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진주 순교자로는 정찬문(안토니오, 1822~67)이 있다. 경상도 진주 허유고개 중촌(경남 진주시 사봉면 중촌리)에서 태어난 그는 먼저 세례를 받고 입교한 아내로부터 천주교 신앙을 듣게 됐으며, 41세 때인 1863년에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3년간 열심히 계명을 지키며 살았다. 1866년 가을에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돼 진주로 끌려간 그는 25일간 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주 형벌을 받았고, 1867년 1월 25일 옥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병인박해 당시 중국으로 피신했던 리델 신부는 1870년 6월 5일 로마에서 주교품을 받고 제6대 조선대목구장이 된다. 리델 주교는 이후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입국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먼저 1876년 5월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가 입국해 서울에 도착했다. 병인박해 이후로 본다면 10년 만에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온 셈이었다. 선교사들은 다시 교우촌과 신자들을 방문해 교회 재건에 매진했다. 그로부터 또다시 10년이 지나 드디어 1886년 6월 4일 조선과 프랑스가 13개 조항으로 구성된 한불수호통상조약 체결하면서 가톨릭교회는 박해에서 벗어나 선교의 자유를 향한 의미 있는 첫걸음을 뗀다.

 그러나 1888년에도 순교자가 발생한다. 진주에서 순교한 윤봉문(요셉, 1852~88)이다. 경상도 경주 인근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에 열심이었으며 병인박해 때 집안 재산을 몰수당한 뒤 양산으로 이주했다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거제도로 건너가 진목정(경남 거제시 옥포동)에 정착했다. 그의 부친 윤사우는 그 이전부터 비밀리에 천주교 신앙을 전파했으며, 진목정으로 이주한 뒤에는 진 요한 가족에게 복음을 전해 입교시켰다. 이 인연으로 진 아녜스와 혼인한 윤봉문은 1887년 겨울 경상도 사목을 맡고 있던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방문하자 회장에 임명돼 로베르 신부를 안내하면서 성인 15명에게 세례성사를 주는 데 함께했다. 로베르 신부가 떠난 이듬해 봄 거제에서 박해가 일어나 동료 신자 3명과 함께 통영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그럼에도 혼자만 통영으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던 그는 1888년 4월 1일 옥중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마산교구는 올 들어 지난 4월 윤봉문의 유해를 기존 족박골(거제시 옥포2동) 묘소에서 새로운 묘소(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 산 103-12)로 이장했으며, 순교자 기념성당과 유물전시관, 순례자의 집 등을 조성해 성지로 개발할 계획이다.

   정리=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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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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