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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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공개대학⑩] <끝> 이성례 마리아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

차기진(청주교구 양업교회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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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자 이성례(마리아, 1801~40)와 그의 맏아들 증거자 최양업(토마스, 1821~61) 신부!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 시복을 추진하는 대표적 모자 `하느님의 종`이요, 드러내고 또 드러내고 싶은 모범적 신앙 선조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좌포도청에서 그 무서운 형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의 아내요, 그의 아들이다. 그래서 모자의 삶과 신앙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렇지만 우리가 수없이 바쳐온 묵주기도처럼 이들 모자의 이야기는 아무리 되새겨도 부족할 뿐이다.

 `모진 육정을 극복한 위대한 어머니`. 이성례는 이 한 구절로 설명될지 모르겠다. 어느 성극은 `엄니 이성례`라고 작품 제목을 정했는데, 이는 찰나의 세상에서 다 듣지 못한 어머니라는 말을 영겁의 천국에서 들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붙인 제목인지도 모른다. 이성례는 20년 동안 여섯 아들의 어머니로 살았지만 맏아들 최양업에게서는 15세 이후로는 어머니라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막내 스테파노에게선 어머니라는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옥중에서 하느님께 아들을 바쳐야 했다.

 이성례는 `내포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집안에서 4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나 18세 때 세 살 아래인 최경환 성인과 혼인해 다리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1827년 무렵부터 서울 낙동으로, 강원도 김성으로, 경기도 부평으로, 안양 수리산으로 이주해 신앙생활을 했다. 그의 삶과 관련해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첫 번째로 이성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씩씩했다고 한다. 기해박해 때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기 전 치근거리는 포교를 따끔하게 혼내준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둘째로 이성례는 최경환 성인과 함께 한평생 성가정을 이끌며 진실한 신앙의 삶을 살았다. 1836년 맏아들 최양업을 하느님께 바친 것은 이들 부부의 신심을 잘 설명해주는 가장 좋은 예다. 세 번째로 인내와 극기의 정신 또한 뛰어났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극도의 궁핍과 굶주림 가운데 험한 산속으로 방황하기를 수년 동안 거듭했음에도 이 모든 것을 기쁘게 참아 받았다. 넷째로 혁혁한 순교의 용덕이다. 기해박해 당시 남편 최경환, 다섯 아들과 체포된 그는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증거했지만 막내 스테파노가 옥중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약해졌다. 이에 거짓말로 배교한다는 한마디를 하고 집에 돌아온 이성례는 맏아들이 마카오에서 유학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 형조로 압송됐고 전옥서에서 동료들의 권면에 힘입어 다시 용덕을 갖게 됐다. 이 용덕은 스테파노가 굶어죽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육정을 극복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마침내는 1840년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행형쇄장(行刑鎖匠, 회자수)의 칼날을 용감하게 받았다. 이에 앞서 그는 자식들과의 마지막 만남을 뿌리쳤다. 동양 윤리나 사상으로 보자면 이성례는 비정한 어머니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점은 오히려 배교를 뛰어넘은 혁혁한 순교의 용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제 이성례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시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최양업 신부의 신앙 생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신학생이요 두 번째 사제라는 점이다. 그는 1836년 2월 6일 경기도 부평에서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돼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ㆍ김대건(안드레아)과 함께 마카오로 출발해 조선인 가운데선 최초로 신학 수업을 받았다. 또 1849년 4월 15일에는 상하이에서 조선인 가운데 두 번째로 사제품을 받았으며, 랴오뚱 차쿠성당에서는 한국 천주교 사제로는 최초로 중국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목함으로써 최초의 북방 선교사로 기록된다.

 조선에 돌아온 뒤로는 무려 11년 6개월간 박해의 위협을 무릅쓰고 5개도 교우촌을 순방하며 사목했으며 한글로 `천주가사`를 지어 보급했다. 1853년에서 1856년 여름에는 진천 배티교우촌에서 조선대목구 신학교 겸 성당ㆍ사제관에서 거처했으며, 1854년 초엔 조선 신학생 3명을 선발해 말레이시아 페낭신학교로 파견하기도 했다. 1850년대 한글본 「성교요리문답」과 「천주성교공과」를 편찬한 활동도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1861년 6월 15일 사목 보고 차 상경하다가 진천공소(경북 문경설도 있음)에서 과로와 장티푸스로 선종했다.

 그의 신앙과 영성은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ㆍ희망ㆍ사랑 △예수ㆍ성모ㆍ성인 신심 △선교영성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또 그의 사상과 의의를 평가하자면 △조국애를 가슴에 품고 살았던 사상가 △서양 근대 학문을 수용하고 가르친 청소년 교육자 △한글을 사랑하고 널리 보급한 위민(爲民) 사상가 △서양음악 수용의 선구자요 천주교리 토착화의 선각자로 집약할 수 있다.

   정리=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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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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