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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진단] 가톨릭평화신문을 만든 까닭(오창익, 루카,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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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진실을 드러내는 정직한 신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진리와 사랑에 의한 인간다운 사회, 보다 인간다운 세계로 만들어 나가려는 선의에 장애가 되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독립된 신문.” 평화신문 창간사다. ‘평화(가톨릭평화방송ㆍ평화신문)’는 정의 넘치는 사회와 그리스도 평화의 실현을 지향하겠다는 다짐으로 34년 세월을 살았다.

언론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지 않고, 언론은 무엇보다 정직해야 하며 인간다운 사회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이 돋보인다. 맞다. 교회가 언론을 운영한다면, 바로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신문을 펴내거나, 라디오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는 많은 품이 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품은 곧 돈을 뜻한다. ‘평화’ 보도국에는 20명 남짓한 기자들이 일하고 있다. 이들이 취재와 기사 작성, 데스킹을 통해 신문 지면을 꾸리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보도물까지 만들어야 한다. 조중동보다 규모가 작다는 한겨레만 해도 300명 넘는 기자들이 근무하고 있다.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없이 종이 신문과 월간지, 주간지만 펴내는데도 그렇다. 5년 넘게 한겨레 사외이사로 일하는 경험에 비춰보면 ‘평화’ 기자들이 담당하는 기사량은 한겨레에 비해 적어도 네다섯 배는 될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과 한겨레는 창간연월일이 같은 동갑내기지만, 인력과 재정 규모는 상당한 차이가 난다.

인력이 적으니 주로 행사나 보도자료 위주로 갈 수밖에 없다. 너무 소극적인 역할이다. ‘평화’가 창간 정신에 충실하려면, 교회 소식을 단순히 전달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세상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가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하는 것처럼 ‘야전병원 같은 교회’ ‘밖으로 나가 봉사하는 교회’를 위해서도 ‘평화’의 역할이 긴요하다.

‘평화’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꼭 필요한 언론이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더 요긴한 언론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좀 더 품을 들여야 하고, 깔끔하게 잘 만들어야 한다. 기자들을 더 많이 뽑고, 이들이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 기성 언론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구독자와 시·청취자가 더 많아져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인터넷 공간에서도 활발하게 움직여야 한다. 이건 단지 ‘평화’를 운영하는 서울대교구만이 아니라 한국 천주교회 모두의 숙제다.

세상이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다 보면, 소외되는 사람들이 늘어날 거다. 그럴수록 교회와 ‘평화’의 역할이 더 절실하다. 평화신문 창간사에서 밝힌 포부, 진실, 정직, 진리, 사랑, 정의와 평화 같은 말들은 낡은 말처럼 취급당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그런 말들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이런 말을 들을 기회도 별로 없다. 세상은 온통 돈에만 열중하고 있다.

‘평화’는 단순한 선교 매체로 머물러선 안 된다. ‘평화’가 신자 숫자 증가에 얼마큼 도움이 되는가만 따지는 것은 ‘평화’의 존재 이유를 잘못 묻고 있는 거다. ‘평화’의 존재 이유는 세상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로 확인해야 한다. 세상 속에서 야전병원 역할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가 핵심이다.

오늘은 가톨릭평화신문 창간기념일이다. 창간 이념, 곧 복음 정신을 되새기며 우리 공동체의 소중한 자산, ‘평화’를 함께 키우자. ‘평화’가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모아보자.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다 인간적으로 바꾸는 게 교회의 사명이다. ‘평화’는 그러기에 썩 좋은 도구다. 주님의 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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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2-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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