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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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진단] 일-가족 균형, 워라밸(김인숙 모니카,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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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정치계를 떠났지만, 18대 대선에서 내놓았던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의 경선 슬로건은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그것은 ‘저녁이 있는 삶’이었다. 저녁이 있는 삶은 손 전 대표가 정치인으로서 국가를 책임지게 되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압축해 보여주었다. 이 슬로건은 우리 사회의 고속 성장과 그로 인한 피로를 한 방에 날려주는 듯한 이미지로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고 들었다.

가족과 저녁을 먹고 함께 안양천변을, 한강변을, 동네 공원을 한가롭게 걷거나 사랑하는 아이들과 배드민턴을 치거나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거나 하는 그런 삶이었다. 내가 아는 한 지인은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눈물이 났다고 했다. 갑자기 우리나라 모든 사람이 어쩌면 행복해질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만큼 ‘저녁이 있는 삶’은 우리 모두가 원하고 바라는 그 무엇이었다. 이런 ‘저녁이 있는 삶’은 국가의 사회경제적 시스템을 바꾸어야 하는 거대하고 만만하지 않은 변화를 필요로 한다.

서구 선진 복지국가에서 ‘저녁이 있는 삶’과 연관되는 정책적 어젠다가 ‘일-가족 균형(work-family balance)’이다. 사람들은 이를 줄여서 ‘워라밸(work-life balance)’이라 부른다. ‘일-가족 균형’은 가족생활과 노동시장 구조를 일 중심에서 일과 가족생활을 양립할 수 있는 구조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럼으로써 일과 삶(여가)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자는 것이다.

일과 가족의 두 영역은 우리 삶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핵심 화두이다. 따라서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가장 필요한 건 근로시간(일)을 조정할 수 있게 하는 것과 저녁이 있는 가족생활을 지원하는 것이다. 유럽의 선진 복지국가는 일과 가족생활의 균형을 상당 부분 달성했다. 그들은 노동시장의 구조 변화를 위한 제반 입법과 가족생활에 관한 복지 정책을 통해 ‘일-가족 균형’이 가능한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필요시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게 하거나, 주당 근로시간을 단축하거나, 파트타임 노동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거나, 부모보험을 통해 가족생활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우에 부모휴가를 쓸 수 있게 하거나, 보육을 지원하는 등의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이를 사회 전반이 수용할 수 있게 하였다.

우리나라도 그동안 선진 복지국가의 경험을 벤치마킹하여 다양한 제도들을 도입하였다. 무상보육, 탄력 근로 시간제를 비롯해 부모 모두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등 여러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노동시장 변화는 미미하여 극히 일부의 직업군을 제외하고는 ‘일-가족 균형’은 사실상 매우 어렵다. 특히 장시간 노동을 선호하고 제도 도입에 따른 비용지출을 꺼리는 기업 문화는 완고하고 고질적이어서 노동시간 사용에 관한 제도적 변화가 있더라도 이것이 실행되기 어려운 조건에 있다.

이러한 노동시장 구조와 관행의 악조건에서 ‘일-가족 균형’을 이루어 ‘저녁이 있는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지원이 있어야 한다. 이 악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힘은 국가의 정책적 노력에 달려있다. 그러나 52시간 법정 근로시간조차 깨고 69시간 장시간 노동을 독려하고, 노동에 관한 의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현 정권 하에서 ‘일-가족 균형’을 기대하거나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는 것은 너무 먼 이야기다. ‘저녁이 있는 삶’을 상상으로나마 꿈꿀 수 있었던 시절이 그리워지는 엄혹한 시절이다.

김인숙(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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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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