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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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성월 특집] 특별 기고 / 순교자들은 다시 우리 곁으로 걸어 나와야 한다

“순교신앙은 지식 아닌 ‘행동하는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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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 신앙 지킨 힘·용기는 하느님 현존에 대한 믿음서 출발
그들 삶 체계적으로 정리해 한국교회 신앙 운동 이뤄야

한국순교자! 그들은 누구인가. 나는 ‘신앙을 증거하다가 피를 흘려 죽은 자’라는 전투적인 말보다 우리 신앙선조들이 살았던 문화로 표현하고 싶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섬기며 죽기까지 순종한 효자였다. 우리 신앙선조들이 속살로 받아들인 하느님은 ‘부모’였다. 하느님은 인류를 낳으시고 길러주신 큰부모(大父母)였다. 한국의 순교자들은 효자이신 예수님이 살아온 발자취를 뒤따라 걸어간 효자·효녀였다.

신앙선조들은 인생문제에 해답을 주는 종교에 허기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천주교를 통해 자기를 발견한 것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처럼 존귀하고 평등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처음 느끼며 감격하고 신명이 났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부모가 자식을 위해 한없이 쏟아 부은 사랑으로 깨닫고 죽어도 여한이 없는 은혜에 감사하였다. 그러나 당시 기성사회는 살 냄새나는 하느님을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며,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주장을, 신분제로 유지되던 조선사회 체제를 전복하려는 행위로 단정하였다. 또한 백성의 아버지인 임금의 권위와 가장(家長)인 아버지의 권위를 깎아 내리는 짐승들의 무리라고 했다. 천주교 박해의 사단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신앙선조들은 예수께서 걸어가신 사랑과 섬김과 베풂의 삶에 감동하였다.

이들은 양반 상놈을 가르는 신분의 옷을 벗었다. 신도들은 세상 사람들이 현세의 출세와 성공을 위해 이악스럽게 목을 매고, 물욕에 게걸대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신도들은 사람들이 꿈꾸는 세상에 질린 사람들이었다. 신도들은 속(俗) 때를 벗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삶의 으뜸 보람으로 삼아 하느님을 부모로 모신 새로운 가족 공동체 건설에 나섰다. 신앙공동체는 사랑과 섬김과 베풂으로 새 생명의 피가 돌았다. 이렇게 이루어 사는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목격한 선교사들은 가장 이상적인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 땅에서 재현되고 있다며 극찬했다.

신앙선조들은 하느님을 지식으로 믿지 않았다. 한국인의 정서에 부모는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신분이다. 신도들은 부모를 신뢰하는 어린이처럼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삶을 묵묵히 지켜보시는 분으로 믿고 살았다. 그래서 마태오복음 11장 25~26절의 말씀을 화두로 삼았다. 순교자들이 고통을 견뎌내며 평화롭게 죽어 가고, 많은 신도들이 굶주리고 헐벗어 추위에 죽어갈 수 있었던 용기와 힘은 내가 고통을 겪는 순간에까지 하느님이 나와 함께 살아 계시다는 깊고 단단한 믿음 때문에 가능했다.

선조들이 일상생활에서 긴 기도를 바치고 성사(聖事) 받기를 좋아한 것은 하느님과 떨어져 살지 않으려는 열정 때문이다. 특히나 성체성사를 간절히 바랐던 것은 ‘하느님의 성체를 받아먹은 사람의 피와 살이 되어 살아계신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체를 이루어 주는 사제를 천사처럼 공경했다. 게다가 사제는 신도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지옥까지 가 주는 그런 신분으로 여겨 사제를 공경하는 마음이 지극했다.

순교자들은 하느님 나라가 참된 고향으로,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에 가기까지 잠시 사는 여정으로 여겼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생명으로 사는 나라였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탐욕에서 자유스럽고, 인간 본능의 굴레에서 벗어날 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였다.

한국천주교가 겪은 박해는 ‘다름과 틀림’을 분별하지 못하고, 독선적이고 폐쇄적인 시대의 상처였다. 그러나 오늘은 다문화 속에서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를 인정하는 시대다.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박해는 없다. 그러면 순교신앙은 역사의 전설로 머물거나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야 하는가.

그 해답은 1801년(신유년) 박해 때 경상도 흥해로 유배 갔던 최해두가 말한다. 그는 “도끼로 처형을 당하는 죽음은 잠시 치명이지만 은수자(隱修者), 고수자(苦修者)의 공부는 일생의 치명”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도끼날에 목이 잘리는 순교는 잠시 고통을 겪지만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해 매일 매순간 욕망과 감정 그리고 악습을 억제하며 고독과 싸우는 은수자의 긴장된 삶이나, 그리스도와 온전히 결합하기 위해 걸림돌이 되는 나약한 본능과 매순간 치열한 내적 투쟁을 하며 사는 고수자들의 금욕적 삶이 더 어렵다는 뜻이다.

고행주의도 금욕주의도 그리스도교 신앙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의 마음과 생각, 욕심과 집착, 이기심과 아집에서 벗어나는 길은 헛된 망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신앙선조들은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랑과 섬김과 베풂의 삶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신앙선조들은 영적 독서나 기도 뿐 아니라 신앙행위를 ‘신공’이라고 했다. 신공은 영적 수련 또는 수행을 뜻한다. 신공은 다시 살려내야 할 용어다.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은 어려서는 공부만 잘 하고, 커서는 돈만 잘 벌면 성공한 사람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다. 무슨 짓이라도 해서 돈만 잘 벌고, 풍족한 삶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그런 사고가 급기야 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고 있다. 그러면 이런 풍조와 사고의 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교회는 온전한가?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베풂과 섬김을 실천하여 보람된 삶, 살맛나는 세상을 이루는데 모루가 되고 있는가. 이러한 자성 앞에 평생 조상들의 믿음을 찾으며 종심(從心)의 나이를 살고 있는 나는 무거운 책무와 부끄러움을 느낀다. 순교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행동하는 실천인 까닭이다.

무덤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한국순교자들이 살았던 신앙은 우리가 체계 있게 정리하여 한국교회의 신앙운동으로 이루어 놓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신앙운동이 서양교회 중심을 벗어나 순교자들의 영성으로 대신 할 날은 언제일까? 기다려진다.

김진소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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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08-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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