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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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있는 여름’ 우리 교구 건축문화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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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역사 안에서 성당(聖堂) 건축은 4세기부터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미사 전례로 재현하는 공간으로 정착됐다. 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 세워진 최초 교회 건축 기본 양식은 바실리카(basilica) 양식이었다. 이후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고전과 낭만의 절충주의 양식 등으로 변화됐다. 한국에서는 파리 외방 전교회 주도로 성당 건축이 시작됐다. 중세 양식을 모방한 양식에서부터 한옥 성당, 한국과 서양 건축의 절충식 성당, 양식주의와 절충주의에서 탈피한 근대적인 성당 등으로 이어졌다. ‘하느님의 집’(Domus Dei)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집’(Domus ecclesiae)이기도 한 성당은 이처럼 각 시대의 전례와 신앙 자세를 대변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여름 휴가철을 맞아 ‘문화가 있는 여름’ 주제로 교구 내 특별한 교회 건축을 살펴보는 ‘우리 교구 건축문화 답사’를 마련한다. 각 건축물에 깃든 흔적과 이야기는 새롭게 교구 역사와 건축문화의 가치를 이해하고 알아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 하우현성당 사제관

서양식 석조에 전통기와 올려 한불(韓佛) 양식 절충
동서양 기법 혼용된 드문 사례
원형 그대로 유지돼 가치 높아
경기도 지정기념물 제176호


경기도 의왕시 원터면에 자리한 하우현본당은 현재 의왕시뿐 아니라 안양·성남·과천 등지에서 차량으로 15분여 정도면 갈 수 있는 접근성이 좋은 곳이다. 하지만 박해시대에 이곳은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청계산과 광교산자락에 둘러쌓인 지리적 이점으로 교우촌이 형성됐던 장소다.

하우현은 1802년 신유박해 당시 순교한 한덕운(토마스) 복자, 1845년 이 지역에 살다 순교한 김준원(아니체토), 1866년 병인박해 때 목숨을 바친 본당 주보성인 성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를 비롯해 많은 신자들이 거주하며 공소가 형성됐다. 교우들이 때로는 박해를 피하고자 땅을 파고 토굴 속에서 살던 곳이었다 하여 ‘토굴리’라고도 부른다. 특히 하우현은 본당 설립 이전부터 서울 인근 지역의 대표적인 공소로서 안양, 안산, 의왕, 군포, 시흥 지역에 신앙을 전하는 역할을 해왔다. 1884년 고(故) 김기호(요한 세례자) 초대 총회장의 주선과 왕림본당의 도움으로 성당을 건립한 하우현공소는 1900년 교구 내 세 번째 본당으로 승격됐다.

본당에 들어서면 성당 옆 한옥 건물이 신자들을 반긴다. 바로 초대 주임이었던 샤플랭 신부가 1904년에 신축해 2년 뒤 완공한 사제관이다. 사제관은 서양식 석조에 한국 전통기와가 올라간 한불 절충식 건축양식으로 건립됐다. 20세기 초반 사제관을 건축하면서 동서양 건축 기법이 혼용된 매우 보기 드문 사례다. 이는 샤플랭 신부가 이 땅의 전통을 배려하려는 생각이 묻어난 건축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평면 및 구조·의장 등이 갖는 건축사적인 가치를 높이 인정받아 2001년에는 경기도 지정기념물 제176호로 등록됐다. 사제관이 완공됐을 때,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1853∼1922) 초대 주한프랑스 공사가 종을 기증해 헌납식 및 축성식을 거행했을 정도로 양 국가 모두에 의미있는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사제관은 특히 본당이 최초로 건립된 당시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그 가치를 빛낸다. 사제관은 1979년과 2004년에 보수작업을 거쳐 단청을 했을 뿐,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현재는 본당 제2주보성인 성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의 이름을 딴 ‘볼리외 관’이라 이름 붙여졌다. 본당은 “사제관은 성당 초기 시절부터 내려온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건물로 그 가치를 지닌다”고 밝히고 있다.

사제관 앞마당에는 성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의 기념비와 성상이 자리해 있다. 프랑스 출신으로 조선에서 사목한 볼리외 신부는 1982년 9월 5일 본당의 제2주보성인으로 선포됐다. 그는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인근 청계산의 둔토리 동굴에 몸을 숨기고 하우현을 오가며 우리말을 배우고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보살폈다.

이 땅의 신자들을 위해 사목한 두 이방인 신부의 흔적이 있는 본당은 지난해 교구 순례사적지 제2호로 지정됐다. 설립 120주년을 맞은 올해 5월 1일에는 윤영민 주임 신부 주례로 성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 유해 안치 봉헌 미사를 봉헌했다. 같은 달 27일에는 본당 성모동산에서 고(故) 김기호 총회장 유해 안치 예식을 교구장 이용훈 주교 주례로 봉헌했다.

현재는 코로나19 4단계에 따른 교구 방침으로 모든 대면 활동과 성전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대신 성당 성모동산에 있는 십자가의 길과 사제관 앞마당 성모상에서 기도 봉헌을 할 수 있다. 성당 앞에 마련된 카페에서 쉬어갈 수도 있다.

※문의 031-426-8921 하우현성당 사무실





■ 안성본당 옛 성당

유려한 팔작지붕의 멋 한껏 살린 목조 성당
프와넬 신부가 설계·건축 담당
한옥-바실리카 양식 조화 ‘눈길’
성당 건축의 토착화 과정 반영


1900년 1월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안성 지역을 방문한 후 지역 신자들은 본당 설립 운동을 벌인다. 신자들은 안성지역 공소를 순방하던 공세리본당 주임 드비즈(Devise) 신부와 협의해 구포리에 현재 성당 터를 매입하고 그 자리의 기와집 21칸을 성당으로 개조했다. 기본 여건을 갖춘 후 드비즈 신부는 1900년 9월 10일 뮈텔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 본당 설립 필요성을 역설했다.

유서 깊은 교우촌을 기반으로 설립된 다른 본당과 달리, 당시 신자가 많지 않던 상황에서 본당 설립이 추진된 것은 이례적이다. 여기에는 지리적으로 교통과 물류 중심이었고, 상업 도시를 기반으로 한 장래성이 기대됐던 지역적 특성과 더불어 개신교 유입에 대응하기 위한 심정이 녹아있었다. 이런 신자들의 간곡한 노력에 힘입어 마침내 1900년 10월 19일 안성본당이 설립되는 결실을 본다.

초대 주임 공베르(A. Gombert, 孔安國) 신부는 여러 해 동안 성당 신축 기금을 모았다. 신자들은 ‘땅을 팔자, 소를 팔자, 우리 손으로 성당을 짓자’며 건립 운동을 전개했다. 공 신부는 1922년 어느 정도 금액이 쌓이자 신자들 협조로 3월에 공사를 시작해서 그해 10월 4일 성당 봉헌식을 거행했다.

파리 외방 전교회 프와넬(Poisnel) 신부가 설계와 건축을 담당한 성당은 264㎡ 규모의 한식 중층구조로 한식과 바실리카 양식을 절충한 형태다. 서울 명동대성당, 전주 전동성당 등 프와넬 신부가 설계한 성당들이 대개 벽돌조 로마네스크 양식 혹은 고딕양식 건물이었던 것을 고려할 때 초기 바실리카식 공간 구성의 한옥 성당이라는 점은 특별하다.

지붕에 모두 기와를 깔고, 용마루 끝과 처마 끝을 들어 올려 한옥 지붕의 멋을 살린 것은 한국적 양식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내부 공간은 서양식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사각형 예배당 모습인데, 구조에서는 전형적인 삼랑식 바실리카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다.

1955년 성당 건물 정문 쪽에 추가로 고딕식 종탑을 증축해 현재 처음의 성당 전면은 볼 수 없으나 후면에서는 한국식으로 합각을 형성한 팔작지붕 형태를 완벽하게 볼 수 있다.

성당 건축의 토착화 과정을 잘 반영한 것으로 평가되는 성당은 현재까지 한식 목구조로 지은 대표적인 한옥 성당에 꼽히며 한국 천주교 성당 건축사의 귀중한 유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건축 과정도 흥미롭다. 공베르 신부는 중국인 기술자 힘을 빌려 성당을 지었다. 기와와 돌 등은 안성군 보개면 동안리에 있던 1786년의 누각식 유교 강당을 구입해 헐어 사용했다. 주요한 목재들은 압록강과 충남 서산 지방에서 운반했다.

당시 안성성당의 건축은 천주교회가 지역 사회에 완전히 정착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본당 측은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박해를 피해 다니던 가톨릭 신자들이 지역의 관심이 쏠린 건축물을 짓는 것 자체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고 밝혔다.

※문의 031-672-0701 안성성당 사무실






■ 구산성당

신자들 스스로 쌓아올린 아름다운 벽돌 구조
6·25전쟁 직후 건축 양식 지녀
택지 개발로 철거 위기 놓이자 건물 해체 없이 그대로 옮겨 와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에 있는 구산성당은 김성우(안토니오) 성인이 형성한 교우촌에서 시작한 구산공소로부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구산(龜山)은 지역에 있는 동산이 거북이 모양을 닮았다 해서 이름 붙여졌다. 구산 지역에 공소가 형성된 것은 1830년대 이전으로 추정되나 공식적인 시작은 1836년 모방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을 때 김성우 성인을 회장으로 임명하면서부터였다. 구산공소는 기존 박해시기 신자들이 피신해 형성된 교우촌과 달리, 김성우 성인이 전교로써 신자들과 함께 형성한 공소이자 교우촌이라는 특징도 가진다.

김성우 성인의 생가터에 건립된 성당은 성인의 순교정신을 이어받듯 1956년 5월부터 2년간 신자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세워 더 큰 가치를 지닌다. 당시 구산공소였던 이곳에 신자들은 경당을 건립하고자 논을 빌려 공동경작해 수확한 쌀 100가마를 팔아 자금을 모으고, 한강변에서 자갈을 채취하는 등 온갖 일을 도맡아했다. 마침내 완성한 경당은 이후 1979년 6월 30일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된 뒤, 성당으로 지역 신앙 중심지 역할을 해나갔다. 성당은 아름답기로 유명해 여러 차례 영화·드라마 단골 촬영지로 등장해 대중들에게도 익숙하다.

성당 건물은 6·25전쟁 직후 세워진 성당 건축 양식인 벽돌 구조로 세워졌다. 내부 공간 또한 분절이 전혀 없는 강당형 구조라는 특징을 지녔다. 특히 주변 미사강변도시 대규모 개발로 인한 주택단지 조성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음에도 당시 건축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

성당이 원형 그대로를 보존할 수 있었던 데는 구산본당 공동체와 교구의 성당 보존을 위한 염원이 있었다. 성당은 2017년 경기도 하남시 미사지구 대규모 택지개발 사업이 추진되면서 철거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교구와 본당은 구산 교우촌의 역사와 신자들의 추억이 담긴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문화재로서 가치를 살리고자 보존을 결정했다. 이를 위해 그해 60년 된 첨탑 등을 분리한 뒤, 본래 벽돌 건축물 자체를 해체하지 않고 기존 위치에서 220m 가량 옮기는 방법으로 현재 자리에 그대로 옮긴 뒤 입구 첩탑을 다시 조립해 복원했다. 이는 국내 건축사에서도 최초 사례로 기록됐다.

성당은 최근 이러한 가치와 노력을 인정받아 올해 2월부터 국가문화재등록이 추진됐다. 하남시는 문화재등록 추진 당시 “구산성당이 초기 한국 천주교 발전과 재건에 있어 절두산순교성지와 더불어 지정학적으로 매우 의미 있다”고 지정 가치 및 근거를 제시한 바 있다. 올해 6월 국가문화재등록 사전심사를 통과한 성당은 앞으로 6개월 간 경기도 문화재위원회의 국가등록문화재 신청을 위한 사전심의와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 후 국가문화재등록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

구산성당은 코로나19 이전만해도 이전이 완료되면 소규모 행사와 혼배·장례미사 때마다 신자들에게 내부를 개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현재 코로나19 4단계에 따른 방역조치로 임시성당을 포함해 모든 공간을 개방하지 않고 있다. 대신 신자들은 성당 옆에 있는 성모상과 임시성당 옆에 있는 십자가의 길에서 기도할 수 있다.

※문의 031-792-4631 구산성당 사무실





■ 신봉동성당

‘능동적 전례 참여’ 전례헌장 정신 잘 녹여내
반타원형 구조 좌석 배치 특징
성미술도 처음부터 함께 고려
전례 공간과 뛰어난 조화 이뤄

성당을 건축할 때에는 전례 거행과 공간이라는 의미를 함께 중심에 놓는다. 외부 형태와 공간을 기준으로 하는 건물의 의미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만찬을 재현하는 미사 전례가 거행되는 특징을 갖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헌장」을 통해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10항)으로 전례의 중요성을 밝힌다. 아울러 이런 배경에서 전례 교육과 전례에의 능동적 참여의 촉진을 요구한다.(14-20항)

그런 만큼 전례 거행의 장소인 성당 건축에도 「전례헌장」의 정신이 드러나야 함이 마땅하다. “성당이나 이러한 장소는 거룩한 예식을 거행하고 신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데에 알맞아야 한다. 거룩한 건물이나 하느님 예배와 관련된 물건은 참으로 품위 있고 아름다워야 하며 천상 실재에 대한 표지와 상징이 되어야 한다”는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288항 내용은 그 중요성을 뒷받침한다.

광교산 동쪽 자락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태봉로 27번길 8에 자리한 제1대리구 신봉동성당(주임 조원식 신부)은 교회 내 건축 전문가들로부터 ‘능동적 전례 참여’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이 잘 적용된 사례로 제시된다.

성당에 들어서자 로비 왼편에 있는 성당 문은 열린 상태였다. 신자들의 좌석은 8열 반타원형으로 배치돼 있었다. 고딕이나 로마네스크 형식 성당에서는 제단과 신자석이 분리될 수밖에 없다. 반면 타원형이나 마름모꼴 모양 성당 구조는 신자들을 제대에 집중시키며 능동적 전례 참여가 가능하도록 한다.

어느 곳에서든 시선이 모아지는 제대. 높이도 회중석과 비슷하고 거리도 3~4m 정도다. 신자들과 제대가 그만큼 가깝다는 뜻일 것이다. 목자와 양이 떨어지지 않고, 목자가 팔을 펼쳐 안아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오후의 햇살을 머금은 제대 뒤편 9m×6m 크기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화려한 듯 보이지만 겉돌지 않고 제대 중심의 분위기에 스며드는 느낌이다.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빛의 화가’로 불리는 김인중 신부(프랑스 도미니코 수도회) 작품이다. 제대 좌우 각각 1m×6m 6개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열두 사도,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그 모두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는 의미를 드러낸다. 도자 회화의 14처 원형 십자가의 길은 동양적인 느낌도 자아낸다. 모두 김 신부 작품이다.

2008년 신설된 본당은 성당 신축을 준비하며 설문조사를 진행했고 김인중 신부 작품을 설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김 신부는 성당 건축 시작부터 설계와 작품 구상을 함께했다. 설계는 프랑스 건축가이자 신학자 베르나르 게일러의 밑그림을 바탕으로 진행됐다.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전례 공간에 녹아든 예술 작품의 전형으로도 주목된다. 건축학 박사 김진태 신부(제2대리구 도촌동본당 주임)는 “전례가 거행되는 성당의 성미술품 역시 신자들이 능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하도록 협력한다는 의미가 깃들어져야 한다”며 “신봉동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예술이 전례에 기여하며 조화를 이룬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건축면적 2210.07㎡, 연면적 6503.44㎡,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 성당은 마치 성체를 보는 듯한 둥근 형상 외관으로도 눈길을 끈다.

※문의 031-261-7133 신봉동성당 사무실









이재훈 기자 steelheart@catimes.kr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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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1-07-27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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