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제주교구 중앙본당

험난한 역사 소용돌이 헤쳐 온 제주 복음화의 못자리·순례지/ 고난의 역사 이겨내고서 지역 교육·자립에 앞장/ 비신자·타 종교인까지 힘 보태 지은 성당 ‘이례적’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제주도에 복음이 처음 전파된 때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 때 일본을 방문하고 제주로 돌아온 김복수는 당시 교리서와 기도문 등을 갖고 와 천주교를 처음 소개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순교한 황사영의 아내 정난주가 제주도로 귀양을 오며 신자가 상주한 흔적이 새겨졌다. 사도세자의 처남인 홍낙임도 천주교를 믿은 대가로 제주도에 유배돼 사약을 받고 순교했다.

김기량은 제주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고기잡이를 하다 풍랑으로 표류한 그는 중국에 불시착, 우연히 만난 조선인 신학생을 통해 입교한다. 다시 제주도로 돌아와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친 그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예비신자들의 세례식을 위해 육지로 나가던 중 통영 앞바다에서 체포된다. 모진 고문에도 꿋꿋이 신앙을 지켰던 그는 결국 가슴에 대못이 박히는 처형으로 순교했다. 이후 양용항이 제주 지역에서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치던 즈음,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제주도에 본당을 설립한다.



 
▲ 제주 중앙성당의 3개로 구성된 십자가탑은 삼위일체와 함께 제주도의 특징인 삼다(三多), 삼무(三無), 삼보(三寶)도 뜻한다.
 
 
옛 도심을 빼곡히 메운 빌딩들 사이에서 유달리 훤칠하게 뻗은 성당이 눈길을 끈다. 꺾일 듯 고개를 한껏 들어보면 그 시선의 끝은 십자가탑에 머무른다. 3개로 구성된 십자가탑은 삼위일체와 함께 제주도의 특징인 삼다(三多), 삼무(三無), 삼보(三寶)도 뜻한다고 한다. 이 로마네스크풍 고딕 양식의 장중함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는 주인공은 바로 제주 중앙성당이다.

성당이 서 있는 곳은 1899년 제주교구에서 처음으로 본당공동체가 자리 잡았던 터다. 제주본당(현 제주 중앙본당, 주임 김영태 신부) 초대 주임인 페네(Pyenet) 신부는 남문 인근 한옥을 사들여 성당으로 꾸미고 본격적인 사목활동에 돌입했다. 자그마한 한옥식 성당이 문을 연 후, 이곳에서는 신자 수 증가에 따라 세 번에 걸쳐 성당을 허물고 새로 짓는 역사가 이어져왔다.

현 성당은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건립, 지난 2000년 대희년에 봉헌됐다. 당시 새 성당은 계획 단계에서부터 본당 신자들만의 힘으로는 완공하기 역부족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게다가 기공을 하자마자 갑작스레 덮친 외환위기로 당시 신자들이 느낀 막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하지만 성당은 제주도내에서도 명물이자 우수 건축물로 꼽힐 만큼 근사하게 새 모습을 드러냈다. 본당 신자뿐 아니라 전 교구민과 지역주민들이 한마음으로 뜻을 모은 덕분이었다.

잠시 시간을 되짚어 올라가보자. 1930년 12월, 제주도민들은 처음으로 서양식 건물을 구경하게 된다. 옛 고딕 양식으로 선보여진 제주성당이었다. 이 성당은 당시 제주도 유일의 서양식 건물이기도 했다. 특히 고딕식 첨탑에서 울려 퍼지는 삼종소리는 제주도 전역에 유명세를 떨치며, 지역주민들의 시계 역할까지도 톡톡히 해냈다. 하지만 본당은 1960년대 들어 신자 수가 급증함에 따라 이 성당을 허물고 새 성당을 마련했다.



 
▲ 고딕식 적벽돌조로 완공돼 1930년 12월 봉헌식을 가진 제주 중앙성당(당시 ‘제주성당’)의 옛 모습.
 
 
이후 오랫동안 추억 속에만 아련히 남아있던 옛 ‘뾰족당’의 모습이 재건된다는 소식은 신자뿐 아니라 수많은 제주도민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재정적 어려움으로 성당 공사가 난항을 겪는 상황이 알려지자 비신자는 물론 타 종교인들도 건립기금을 보내왔다. 옛날 ‘뾰족당’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던 이들의 따스한 마음에서 우러난 정성이었다. 이에 따라 제주 중앙성당은 한국교회 역사상 이례적으로 신자와 비신자 뿐 아니라 타 종교인까지 힘을 보태 지은 성당으로 더욱 사랑을 받고 있다.

제주도는 오랜 기간 가톨릭 신자가 개신교 신자보다 많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초기교회의 선교활동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의 어려움을 딛고 서야 했다. 당시 교회와 지역사회간의 상호 몰이해와 배타성, 월권 문제 등의 갈등은 매우 심각했다. 이러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러 폭력으로 도발된 사건이 1901년 발발한‘제주교난’이다. 교회는 이 사건으로 신자 500~70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본당은 제주교난이 수습되자마자 제주 여학당을 세우는 등 지역민들의 교육과 자립을 돕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어진 일제의 탄압은 본당 선교 활동의 팔다리를 모두 묶었다. 급기야 1941년에는 성당과 사제관 등을 모두 몰수당했다. 일본군은 당시 성당을 육군병원으로, 사제관 등 부속건물은 장교 숙소로 사용하며 어지럽혔다.

해방 후, 오랜 시간 중단됐던 선교활동의 불씨를 다시 피어 올리기도 전에 이번엔 한국전쟁의 고난을 견뎌내야 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한국전쟁은 제주도 내 선교활동에 큰 도움이 됐다. 전쟁 중, 수많은 성직·수도자와 신학생, 신자 등이 제주도로 피란, 이들의 신앙생활에 힘입어 도내 선교활동은 다시 활기를 띨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본당은 한국교회 역사상 그 어느 본당보다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와야 했다. 그 가운데 본당은 순교자들이 피 흘려 쓰러져간 터와 고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어오며, 교구 역사와 순교사를 재조명할 수 있는 ‘순례성당’으로 뿌리내렸다. 제주도 복음화의 못자리로, 역사의 주인공으로 우뚝 선 본당은 인근 관덕정(보물 322호) 등과 함께 도보로 돌아보기 좋은 순례코스로도 적극 추천된다.




가톨릭신문  2012-02-12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29

시편 33장 1절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올곧은 이들에게는 찬양이 어울린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