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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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 수품 50주년 맞은 윤공희 대주교

“사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곁에서 고통 나눠야”/ 한국 세 번째 주교품 금경축 … 초대 수원교구장 활동/ “5·18 운동, 가장 힘든 체험” … 진실규명 활동 앞장/ “사회복음화 힘쓴다면 참 고마운 교회 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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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교 수품 50주년을 맞은 윤공희 대주교는 지난 시간 동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 함께하지 못한 것에 반성하고 있다는 말로 덤덤하게 금경축의 소회를 밝혔다. (사진 주정아 기자)
 

해질녘 광주가톨릭대학교 정문을 향해 윤공희 대주교가 발걸음을 옮긴다. 한 손에 묵주를 쥐고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나아간다. 격동의 근현대사에서도 묵묵히 신앙인의 길을 걸으며 이제 주교 수품 50주년을 맞은 윤공희 대주교, 22일 있을 기념행사를 앞두고 윤 대주교가 아로새긴 족적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는 시간을 가졌다.

“사제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주교 수품 50주년을 맞아 여기저기에서 축하를 해주고 있지만 저는 그렇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며 살고 있어요. 금경축도 조용히 넘어갔으면 좋겠지만 뜻대로 안되네요.”

윤 대주교는 전 부산교구장 고 최재선 주교와 전 인천교구장 나길모 주교에 이어 한국교회에서 세 번째로 주교 수품 50주년을 맞았다. 사제 수품도 아닌 주교 수품 50주년이지만 윤 대주교는 ‘반성하고 있다’는 말로 덤덤하게 금경축을 맞는 소감을 밝혔다. 인간의 자유와 권리가 심각하게 유린되는 현장에서 고통 받는 이웃들과 함께하며 시대의 아픔을 나눠왔지만 그 시대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은 너무도 많았다.

5·18 진상규명 앞장선 ‘광주의 대부’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제게 가장 충격적이고 어려운 시기였어요. 그 이야기를 하다보면 혈압이 오르죠.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떠올라 생각이 정리가 안 될 정도예요.”

지난 50년 중 27년 동안 광주대교구장으로 사목한 윤 대주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피 흘리며 신음하던 광주의 참상을 직접 경험했다. 군인들이 청년들을 잡아다가 땅바닥에 엎드리게 만들고 발로 차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하고, 응급처치가 필요한 청년에게 다가가지 못한 아픔도 겪었다. 그리고 교구 사제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다.

“가톨릭센터 6층에서 내려다보니까 군인들이 쫓아가면서 젊은이들을 잡아오는데 옆에 있던 다른 군인이 젊은 사람의 얼굴을 발로 차고 엎드리게 한 다음 일어나려고 하면 때리는 것을 봤어요. 쫓겨 간 군중들의 신발이 벗겨져 사방에 버려져 있는 것도 봤죠.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피 흘리고, 분위기는 너무도 험악했어요.”

윤 대주교는 5·18에 대한 진실을 알리고 평화적으로 수습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자 교회 활동에 대한 압력이 커져갔다.

“남동성당에서 시국미사를 봉헌하기로 했는데 군인들이 성당을 완전히 포위했어요. 분위기가 험악해져서 미사를 하지 말자고 했더니 신부들이 정말 마음 아파하고 섭섭해 하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후회했어요. 앞으로는 어떻든지 나 혼자 결정하지 않고 신부들이랑 함께 해야겠구나 하고 결심하게 됐죠.”

윤 대주교는 교구 사제들과 함께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했고, 고통 받는 이웃들과 함께했다. 또한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돼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이들의 사면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이러한 노력들 덕분에 윤 대주교는 ‘광주의 대부’로 불렸다.

“광주대교구는 특별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잘 이겨내고 복음화를 이뤄냈어요. 교구민들이 앞으로도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를 받아들이고 삶으로 잘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겸손한 믿음과 깊은 믿음으로 살아갔으면 합니다.”

6·25 중에도 종군신부로 사목

“사제로서 고해성사를 준다는 것은 아주 귀중한 직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6·25 전쟁 중 유엔군 종군신부로 사목하면서 수용소를 돌며 고해성사를 주고,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세례 받는 이들을 보며 사제로서 많은 것을 느꼈지요.”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덕원신학교에서 사제의 꿈을 키우던 윤공희 대주교는 서품을 앞두고 교구장이 공산정권에 의해 납치되는 비극을 경험했다. 공산정권의 박해를 피해 지학순 주교와 함께 목숨을 걸고 서울로 온 윤 대주교는 1950년 3월 20일 사제품을 받고 서울 명동본당 보좌로 사목을 시작했지만, 그 해 6월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가 일어났다.

전쟁 중 윤 대주교는 유엔군 종군신부로 사목했다. 포로수용소를 돌아다니며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예비신자 교육을 실시했다. 포로수용소에는 이질과 폐병환자들이 많아 임종대세를 받고 죽어가는 모습을 수없이 지켜봐야했다. 죽는 이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인사를 나누고 다음 주에 찾아가면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된 경우가 자주 있었다.

수원교구 초석 마련에 헌신

“어려운 환경에서 무사히 피난을 내려와 인생의 목표였던 신부가 됐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쁜 마음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서품을 받았지요. 그러나 주교품을 앞두고서는 아주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수원교구 초대교구장으로 임명, 주교로 서품된 윤공희 대주교는 서울 명동본당 보좌신부로 잠깐 사목했던 것 외에 본당 신부로 지냈던 경험이 없었다. 본당 사목 경험이 많은 총대리 신부를 필요로 했던 윤 대주교는 당시 복수동본당 주임 장금구 신부를 총대리로,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손태섭 신부를 비서신부로 임명했다. 교구청 직원이 교구장, 총대리, 비서 단 셋뿐인 단출한 살림이었다.

윤 대주교는 수원교구의 기틀을 놓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교구장 직무를 시작하자마자 본당 사목방문을 통해 교구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고, 미리내 성지를 통해 교구민들이 순교신심을 고취시키고 뿌리 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아울러 독일의 성빈센트드뽈자비의수녀회를 교구로 초청했으며, 해외에서 모금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10년 간 수원교구장으로서 열과 성을 다해 교구의 반석을 마련했다.

“제가 제때에 물러났구나하고 생각해요. 인구가 늘어나고 사회적 환경이 변화하면서 사목적 과제들이 많이 생겨났지만 교구가 잘 대처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회에 잘 응답했어요. 신자들의 숫자가 늘고 영적으로 활력이 넘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참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주목받는 한국교회 고마워”

“TV보다는 신문을 보고 있어요. 가톨릭신문과 평화신문을 보면서 위로를 받고 그 나름대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잘하고 있구나, 우리 한국교회가 하느님의 은총을 잘 받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죠.”

윤 대주교는 식사량이 줄어든 것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식사량 조절이 필요해서 그럴 뿐 여전히 맛있게 잘 먹고 있다”며 활짝 웃



가톨릭신문  201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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