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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문화] 생명, 다르게 보기 ①마른 지식이 생명력을 고갈시킨다

스스로 고민하지 않는다면 행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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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혜순 박사(서강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근래에 독일에서 출간되는 저서들은 울리히 백의 「위험 사회」,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 사회」처럼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사회는 지금 심각한 질병에 걸려 어디로 휩쓸려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표류하고 있다. 그래서 `부유(浮游)하는 사회`, `표류하는 사회`, `생명위기의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과도한 입시경쟁, 취업 문 앞에 늘어선 인산인해의 인파, 늘어나는 실업률, 자영업의 줄 이은 파산, 여기에 깡통주택까지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모두 어둡고 암울하기만 하다. 늘어나는 노숙 행렬, 죽음의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점에서는 `암흑 사회`에 가깝다. `힐링`이라는 단어가 유행어가 되고 있는 것이 곧 우리 사회가 질병 상태임을 말해준다.

 얼마 전 작년에 졸업한 한 학생을 만났다. 재학 시절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늘 밝고 긍정적이었는데 젊고 싱싱하던 아름다움은 풀기 없이 사그라지고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졸업만 하면 새로운 길이 열리겠지 했지만 졸업 후에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소속감 없는 백수 생활이었다.

 희망 연봉을 턱없이 낮춰도 취업의 문턱은 좀체 낮아지지 않았고 그녀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지금은 국비 보조로 운영되는 학원에 다니고 주말에는 샤브샤브 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선생님, 명문대 나와서 식당 알바로 연명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한 달 수입이래야 고작 40여만 원, 생계를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자격증 취득 과정이 끝나면 식당 아르바이트보다 수입이 나은 가사 도우미라도 해야겠다고 한다. 제아무리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는 하지만 대졸의 젊은이가 파출부 일까지 침범(?)한다면 가사 도우미 일을 해오던 나이 든 사람들은 또 어디로 밀려나야 하나? 생존의 위기감이 도미노 현상을 이루고 있다.

 이런 사실은 새로울 것도 없고 모르는 사람도 별로 없다. 문제는 누구도 속 시원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우선 정확한 진단이 앞서야 한다. 우리 사회가 위기에 처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고학력자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는데 이런 위기 상황을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사회가 더 각박해지고 살기 힘들어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키워주지 못한 왜곡된 교육 방식에서 비롯된 것 같다. 지식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은 지식에 불과하다. 비판의식 없이 지식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것은 한낮 지식의 창고에 불과하다. 지인 가운데 한 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다. 그분이 소유하고 있는 지식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가히 걸어 다니는 서점이라 할만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분은 풍부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지혜롭지는 못해서 가정의 불화가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분도, 가족도 행복하지 못하다. 행복한 사회, 건강한 사회는 사회 구성원들의 지혜로운 선택에서 나온다.

 지식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지혜이고, 지혜는 생각을 통해서 자라난다. 생각은 질문을 낳고 인간의 사유능력은 질문을 통해 발전되고 성숙해 간다. 질문은 끊임없는 사유 과정에서 생겨나고, 인간은 치열한 고민 속에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낸다. 그런데 사고 능력보다 암기력을 중시하는 현행 교육제도는 끊임없이 질문할 줄 모르는 인간을 양산해내고 있다. 현대인은 조금만 복잡해도 생각하기를 귀찮아해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답을 모르면 쉽게 포기해버린다. 암기하고 대답하는 데만 길들여져 왔을 뿐 질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고, 또 왜 해야 하는지 필요성도 느껴본 적이 없다. 살아가면서 어려움은 항상 있게 마련인데 그것을 견뎌내는 것은 지혜의 힘이다.

 지혜는 고통을 통해서 터득된다.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면 살아 있는 지혜를 얻기 어렵다. 죽은 고목에서는 싹이 돋지 않듯 마른 지식에서는 지혜의 싹이 돋지 않는다. 「논어」 위정 편에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망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말이 있다. 삶을 윤택하게 하지 못하는 지식은 마른 지식에 불과하다. 요즘 젊은이들이 대학에서 지혜를 배우기보다 스팩 쌓기에 전념하는 현상도 결국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불쏘시개를 주워 모으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배운 지식을 지혜로 발전시키고 이 사회에 뿌리 내리고 안착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우리의 당면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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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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