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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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문화] ④ 문화적 폭력과 생명

죽음 부르는 사회·문화 현상에 맞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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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언젠가 몸을 지닌 존재로서 인간에게 폭력이란 숙명과도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폭력은 힘으로 행사하는 단순한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그 이상의 모든 억압적 현상을 두루 가리킨다. 예를 들어 우리 삶과 인간 존재 전체에 걸쳐 일어나는 왜곡과 소외는 물론, 잘못된 사회체제나 제도의 모순에 의해 일어나는 억압 역시 폭력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미를 잃어버리고 겉꾸미는 문화에 휩쓸려 부화뇌동하는 것, 자신의 존재의미를 살피지 못하고 바깥의 사물적 세계에 매여있는 것도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는 존재론적 폭력일 수 있다. 그래서 르네 지라르 같은 학자는 종교란 폭력을 막으려는 폭력이라고 말한다. 종교제의(祭儀)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더 큰 폭력을 막는 의례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낙원에서 추방된 이래 세계와 인간의 삶을 보면 이런 관점이 지나친 주장이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출산은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고통을 주지 않는가. 죽도록 고생해서 땅을 가꿔야만 자연은 우리 생존을 위한 음식을 허용한다. 현대 과학기술 문명으로 잊고 있지만 자연은 결코 낭만적인 꿈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싸워 이겨야 할 고난 그 자체다. 생명을 존중하고 모든 생명을 생명답게 이끌어가야 할 사명을 지닌 인간이지만, 살기 위해 인간은 다른 생명을 섭취해야만 한다. 우리 인간 존재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또한 살아있는 모든 생명에는 죽음이 따른다. 죽지 않는 것은 생명이 아니다. 생명은 모순되게도 죽음에 의해 규정되고, 죽음으로 인해 생명일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문화와 사회를 보면 참으로 수많은 폭력과 모순이 얼룩져 있다. 새 생명을 잉태한 모체가 자신을 위해 여러 가지 핑계로 스스로 생명을 지운다. 사회적 폭력과 전쟁은 물론, 사회와 문화 전반에 모순과 갈등, 억압과 소외, 폭력적 현상들이 흘러넘친다. 몇몇 국가를 제외하면 지금도 지구상에는 여전히 전쟁과 분열이 그치지 않는다. 애써 모른 척 하고 싶지만 분명 우리 사회에도 제도적 모순과 경제적 분열로 고통 받고 심지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세계적으로 이런 모순과 폭력, 불의와 거짓은 결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외면할 수 없을 만큼 만연하다.

 생명을 존중하는 문화를 위해 나서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죽음을 부르는 이러한 사회적이며 정치적 야만, 문화적 폭력과 죽음에도 맞서야 한다. 이 모든 갈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폭력과 야만에 맞서 평화를 말하며,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죽음과 허무의 세계를 넘어서는 참 생명, 진리와 정의, 평화의 나라를 희망한다. 생명은 필연적 사건인 죽음을 품고 있지만 그 죽음을 넘어설 수 있기에 생명인 것이다. 인간은 근원적 모순을 넘어서는 가운데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 폭력과 갈등, 무의미와 정의롭지 못한 세계에서 이를 넘어 의미와 정의를, 사랑과 평화를 이뤄내는 것이 우리의 존재다. 생명은 불의와 무의미, 폭력과 죽음을 보듬으면서 그 가운데에서 정의와 평화, 진리와 의미를 길어 올리는 존재다.

 인류가 자신의 삶과 세계를 자신의 지성에 의해 이해하고 해석하기 시작한 시기는 모든 문화에서 거의 비슷하게 출발했다. 흔히 철학의 시대라고 부르는 이때 인간은 무엇보다 먼저 자연과 생명에 대해 이해하고자 했다. 자연과 생명에는 그 자신의 고유한 원리가 있으며, 그 원리에 따라 자연은 자연일 수가 있는 것이다. 또 자연과 대비되는 인간의 삶은 문화의 세계다. 문화에는 그래야만 하는 규범(nomos)이 있다. 그것은 당위적이며, 도덕적ㆍ윤리적 영역이며, 또 초월적 층위에서 이뤄지는 세계다. 그것은 `말씀`의 세계이며, 진리와 정의의 나라이다. 생명의 문화는 폭력과 죽음을 넘어 생명이 생명일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에서 이뤄진다.

 생명은 죽음을 넘어 존재하며, 인간 삶은 근원적 모순을 아우르는 가운데 참된 삶으로 존재할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생명의 문화는 불의와 폭력이 사라진 사회, 죽음과 근원적 모순이 사라진 세상에서야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땅 위에서의 생명과 삶은 우리 자신을 통해 이 모두를 감내하면서 이겨내고, 안으로 품어 안으면서 초월해가는 길 위에서 생명으로, 삶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러기에 생명의 문화를 말하는 우리는 우리 존재를 통해 생명과 삶을 그 자신의 존재로 자리할 수 있게끔 만들어가는 길 위에 서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과 나는 그 길에 부르심 받은 인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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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2-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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