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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을 말한다] (25) 내가 뽑은 교회건축/ 대전교구 신리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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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당진시 합덕읍 신리성지에 있는 한옥 건물 내부. 다블뤼 주교 활동 당시 조선교구청이자 주교관이었던 한옥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한 건물이다.
한옥 미닫이문을 활용해 크고 작은 공간을 융통성 있게 변화시키면 미사와 집회, 여러 공소예절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
 
 
  나는 교회건축 토착화의 한 이상적 모델로 박해시대 신리성지 모습을 염두에 두고 있다. 신리성지는 조선교구 5대 주교였던 다블뤼 주교가 1845년 이 땅에 와서 체포, 처형되기까지 21년 동안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하며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을 견뎌낸 한국교회 산실이다.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루카 위엥 신부 등 세 분은 함께 순교하기로 결심하고 같은 날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됐다가 다시 갈매못으로 함께 끌려와 처형됐다. 순교한 날은 다블뤼 주교 소원대로 마침 성 금요일이었다.

 다블뤼 주교의 비서인 황석두 루카와 집주인인 손자선 토마스는 세 분과 함께 10칸짜리 한옥인 이 집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서 「한불사전」을 만들고 「달레의 천주교회사」 자료수집 등 작업을 수행했다. 이 다섯 분은 성인 반열에 올려졌다. 그에 앞서 다블뤼 주교는 「한국주요순교자약전」(1858년) 등 세 편의 비망기를 써서 파리로 보낸 바 있다.

 위엥 신부 기록에 따르면 당시 신리지역은 400명 신자가 모여 살았던, 조선 땅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교우촌이었다. 박해사건 이후 교우들은 모두 도망쳐 빈 마을이 됐다가 다시 교우들이 모여들어 이 건물은 오랫동안 공소로 사용됐다. 지금도 교우와 외교인들이 섞여 살지만 옛날에도 신앙적 분위기를 좋아한 외교인들이 함께 살았고, 이들은 교우들 도움으로 좀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건물이 한옥건축이면서 역사적 의미를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토착화의 모범사례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교우촌`이라고 불리는 신앙공동체라는 사실 때문이다. 교우촌 공동체는 생활 자체로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이다. 설사 외교인이 절반 정도 섞여 있다 하더라도 신리성지의 예에서 보듯, 외교인들도 좋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모범적인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토착화의 모범사례를 보건대 지금 비신자가 많은 일반인 마을에 성지를 조성하면서 구태여 비싼 토지나 건물을 매입하지 않고도, 즉 교구가 땅을 모두 소유해야 하는 성지를 꼭 조성하지 않더라도 외교인들에게 공동체의 일원으로 훌륭히 사는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하나의 생활화된 신앙공동체를 지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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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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