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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성경주해] (180) 테살로니카 1서 4, 13

죽음에 대한 자연적 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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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1테살 4,13】

“…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슬퍼해서는 안 된다고 훈계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사랑한 이들이 믿음 없이 죽은 이들과 달리 죽어 복된 곳에 간다는 것을 아는 특권을 지녔으며 그래서 그들을 즐거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만나다

그대는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이교인처럼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더없이 확실한 약속에 바탕을 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승을 떠난 사랑하는 이들을 우리는 잃은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먼저 보낸 것뿐이며, 우리도 이승을 떠나 그리로 가면 지상에서 사랑했던 것과 비례하여 더욱더 친밀함을 누리며 헤어질 걱정 없이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 「서간집」 92,1,1)

슬픔과 희망

바오로 사도는 슬퍼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이교인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슬퍼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슬픔을 느낄 때면 희망이 여러분을 위로하도록 하십시오.(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173,3)

유익한 슬픔과 해로운 슬픔

우리 마음이 느끼는 유익한 슬픔과 해로운 슬픔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구별할 때 우리는, 영원한 세계로 넘어간 영은 시간의 세계에서 얻는 위로를 잃었다 해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오히려 영은 자기가 지켜야 했던 기준에 못 미치거나 동떨어지게 행동했다고 여기는 일들에 관하여 건강한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슬픔에는 서로 다른 종류가 있다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가르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 종류의 슬픔에는 구원으로 나아감이 있으나 다른 종류의 슬픔에는 죽음이 곧 끝임을 보여 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를 자아내어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세적 슬픔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2코린 7,10)(루스페의 풀겐티우스 「서간집」 2,3)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형인 대 바실리우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큰 누나에게 알린다.

그러자 마크리나는 슬픔에 잠긴 동생을 한 동안 놔두다가 믿는 이들이 가져야 할 죽음에 대한 자세를 일깨워준다.

죽음에 대한 자연적 반감

성도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위대한 바실리우스가 인간의 삶을 떠나 하느님께로 가 교회 전체에 슬픔이 내려앉았을 때 저의 스승인 누이[마크리나]는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저는 서둘러 그녀에게 가 형님에 관한 슬픈 소식을 전했습니다. … 누이는 기마술에 능한 이들처럼 처음에는 제가 격렬한 슬픔에 휩쓸리는 것을 허락했으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녀의 생각이라는 고삐로 무질서한 제 영혼을 제어하였습니다.

그녀는 ‘슬픔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자들이 빠지는 것이니, 잠든 이들 때문에 슬퍼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도의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여전히 마음이 고통으로 끓어오르던 제가 물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에 대한 자연적 반감이 있고 아무도 다른 이가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며 죽어가는 이들은 가능하면, 그것에서 달아나려고 하는데 어떻게 제가 그럴 수 있습니까?’(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영혼과 부활에 관한 대화」)


노성기 신부 (한국교부학연구회·광주가톨릭대학교)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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