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조재연 신부의 청소년 사목 이야기] 너희도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2004년 12월 마닐라의 아테네오대학 EAPI에서 공부하고 있던 중 여러 가지 이유로 열병을 앓고 있었다. 39℃가 넘는 고열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며칠 째 누워서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왜 여기에 와야 하는가. 왜 이 불원천지에서 고열에 혼자 누워있는가 하는 고독감과 슬픔에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던 나에게 헨리 나웬 신부님의 책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책 제목은 「Can you drink this cup?」이었다. 우리말로 「이 잔을 들겠느냐?」일 것이다. 고열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그 책에 담겨있는 내가 직면한 문제들로 날이 밝도록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아침이 밝아오면서 고열이 가라앉고 있음을 느꼈다. 아마 열병은 단순한 열병이 아니라 마음의 열병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 책을 읽고 며칠이 지난 후 오랜 필리핀 친구인 구스만 신부님(Fr. De Gusmann Degz) 초대를 받아 파라냐케 살레시오성당에서 거행되는 서품식에 참여하게 됐다. 한 수사의 서품식이었다. 타갈로그어로 부르는 황홀한 성가와 품위 있는 예절 등 모든 것이 참 아름다웠다.
 
 그 서품 미사 중에 내 마음은 기뻤고 그 서품식은 내 서품 때를 떠오르게 했다. 1990년 2월9일 50여명 수품자들이 김수환 추기경님으로부터 사제로 서품되던 그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런 가운데 한 장면이 이 모든 생각을 멈추고 얼어붙게 했다. 그것은 주교님이 새로 서품되는 수품자에게 성작을 주는 예식이었다.

 그 예식은 내가 수 십 번도 더 보아 온 예식이었다. 그런데 왜 그 장면이 주목을 끌었을까. 주교님이 새 사제의 성작을 축성해 주는 그 장면은 주님의 성찬례를 거룩하게 지내라는 것으로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15년이 지난 한 서품식에서 그 예식의 의미가 다시금 새롭게 나를 초대하고 있었다. 그 한 순간 며칠 전 읽은 「Can you drink this cup?」의 내용이 겹쳐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르코 복음 10장 35~39절을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께서는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고 물으신다.

 바로 새 사제에게 성작을 주는 주교님의 상징적 의미가 바로 당신의 잔 주님의 잔 에 대한 초대라는 것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나는 15년 전 사제 서품식 때 받은 그 잔이 너희도 내 잔을 마실 수 있겠는가? 한 바로 그 잔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 잔은 내가 사목하면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통의 잔이며 백성들 때문에 또 교회 공동체 에서 겪어야 하는 쓰라림의 잔이며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고독의 잔이다. 그리고 내 백성인 동시에 하느님의 백성인 많은 이들의 울부짖음의 잔인 것이다. 또한 특별히 내 성소의 영역에서는 하느님과 교회를 향한 청소년의 갈망이 담긴 잔인 것이다. 머나먼 타국에서 새신부의 서품식을 보며 바로 내가 15년 전 받아들인 그 성작이 이러한 의미가 담긴 잔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통찰하게 됐다.

 
 「Can you drink this cup?」에서 헨리 나웬 신부님은 그 많은 의미가 담긴 잔을 먼저 잡으라고 그런 다음 잔을 들어서 경축하라고 그리고 기꺼이 마시라고 그러면 그 아픔과 고통의 잔은 부활의 잔 기쁨과 축제의 잔 그리고 우정의 잔으로 바뀌고 변화할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지금 그 잔의 의미를 깨닫는 은총의 순간에 와 있다. 헨리 나웬 신부님의 글처럼 내가 지금 마셔야만 할 잔이 아픔과 고통의 잔인 것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고독과 아픔 그리고 상처로 가득한 마음의 잔을 용감하게 움켜잡고 있다. 그리고 누구에 대한 원망이나 비난이 아닌 청소년의 기쁨과 희망 아픔과 울부짖음 을 위해 이 잔을 경축할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성찬례 때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신 것 처럼 나의 보잘 것 없는 잔을 부활의 잔으로 기쁨과 친교의 잔으로 새로운 우정의 잔으로 변모시켜 주시리라 믿는다. 매일의 미사 가운데 나는 내 고통 내 고독의 잔을 든다. 그리고 경축한다.
 

 청소년이 일상으로 겪는 아픔과 기쁨 희망과 슬픔을 위해 건배.
 청소년의 젊음을 담을 수 있는 교회를 건설하기 위해 건배.
 

 그리고 청소년들을 거룩함에로 초대하기 위한 갈망이 담긴 잔을 매일 받아 마신다.

조재연 신부 홈페이지: http://www.frcho.net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06-04-23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5. 2

요한 15장 5절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