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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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31) 희망의 샘

절망 한 복판에서도 희망을 부르는 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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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일부러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한창 강연을 많이 할 때도 청년들과는 만남이 그리 잦지 않았다. 청중은 대부분 30대 이상의 직장인들이나 주부들이었다. 그러던 중 요 근래 20대가 많이 힘들다는 얘기를 듣고 그들을 돕고 싶어졌다. 사실 젊은이를 향한 짝사랑은 늘 있어왔던 터였다.

그래 올 들어 모든 일정에서 청년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이 전해진 모양인지 야금야금 만남의 기회가 빈번해지기 시작하였다. 레지오 청년모임, 대학생 지구 연합회, 지구 청년모임, 국방TV 방송 고정방청객, 모장학재단 장학생 등등… 그리고 심지어 청소년들과 소통의 바람이 교회 밖에서도 일고 있다.

이들이 요즈음 가장 선호하는 강연 주제는 단연 <희망의 귀환>! 감성의 기운이 왕성한 때이기에 자칫 절망에 쉽게 떨어지는 경향도 있지만, 풍부한 역사적 사례와 논리로 차분히 희망 담론을 펼치면 이들은 금세 희망 프런티어로 전향한다. 일단 이들이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으면, 그 다음엔 걱정할 일이 없다. 용광로 같이 뜨거운 열정이 몽땅 희망 에너지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기분 좋은 역전이 이루어진다. 희망을 전하는 내가 되레 희망을 얻고 돌아오는 흥분되는 사태 말이다. 멘토가 멘티가 되고, 멘티가 멘토가 되는 이 신나는 반전, 청년들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나는 이쯤에서 묻는다. 도대체 나는 언제부터 ‘희망’장이가 된 것일까. 내 고집스런 희망의 샘은 대관절 무엇이라고 해야 옳을 것인가. 대답을 얻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금세 죽은 자를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두 글자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부활!

부활이야말로 우리가 절망의 한 복판에서도 희망하도록 만드는, 말 그대로 희망의 샘이다.

■ 저승에 가시어

지난 호에서 ‘묻히셨으며’까지 살펴봤다. 이어지는 고백은 ‘저승에 가시어’다. 라틴어로 ‘데센디트 아드 인페로스’(descendit ad inferos)다. 여기서 ‘데센디트’는 ‘내려갔다’는 뜻이고, ‘아드’는 영어로 ‘to’의 의미를, ‘인페로스’는 ‘저승’을 뜻한다.

그럼 저승은 뭔가?

‘저승’으로 번역된 단어는 본래 구약의 히브리어 ‘셰올’(sheol)에서 기원한 것으로, 그리스어로는 ‘하데스’(hades: 명부[冥府])로 표기되어 있다. 셰올은 ‘돌아오지 못하는 곳’(욥 10,21), ‘깊은 어둠’(욥 10,21 이하 참조)과 ‘침묵이 지배하는 곳’(시편 94,17), 요컨대 ‘죽은 이들이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곳’(욥 3,17-19 집회 30,17 참조)을 지칭한다. 그러니까 ‘저승’, ‘죽음의 세계’를 뜻한다. 이곳은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모든 죽은 이가 가는 장소다.

당시는 지구를 ‘둥글다’라고 보는 대신에 끝이 있는 평면으로 보았다. 지상에 사람이 살고 있고, 위로 천국이 있고, 아래로 지하계가 있어서, 죽은 이들이 천국으로 올라가기 전에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보았다. 언젠가 올려줄 때를 기다리는 곳, 거기가 바로 저승이요 죽음의 세계였다. 이곳엔 아직 심판받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거기에 예수님이 가셨다. 이를 베드로 1서는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시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1베드 3,18-19).

하늘의 아래층에 있는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결정적인 기쁜 소식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므로 교회 전통을 따라 이해할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승에 가 구해 내신 것은 아브라함의 품에서 자신들의 해방자를 기다리던 거룩한 영혼들이었다.”<로마교리서>1,6,3.

예수님은 지옥에 떨어진 이들을 구하거나 저주받은 지옥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보다 먼저 간 의인들을 해방시키고자 저승에 가신 것이다.

결국 저승은 뭔가? 지난 번 나는 예수님이 “주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심으로, 마침내 하느님의 부재, 단절의 자리까지 가신 것이라고 언급했다. 저승은 거기서 조금 더 내려가신 자리다. 곧 인간이 가는 가장 어두운 곳이다. 가장 밑바닥이다. 거기까지 가셔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구제할 수 있는 영혼들(연옥 영혼 포함)을 구제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강생이 어디까지 내려왔는가? 죽은 자들의 세상까지 내려갔다. 기가 막히지 않은가? 예수님의 강생이 여기서 완성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다음에 이루어진 일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코린토 1서 15장 3-5절이다. 물론 복음서에서 이미 부활 증언이 등장하지만, 사실은 이 서간문들이 먼저 써졌고, 복음서는 나중에 기록된 것이다. 그럼 본문을 보자.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

리듬이 꼭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과 비슷하다. 주목할 것은 여기서 ‘사흗날에’가 언급되었다는 사실이다.

■ 사흗날에

‘사흗날에’는 라틴어로 ‘테르씨아 디에’(tertia die)로 되어 있다. 직역하면 ‘사흘째 날에’다.

사흘은 성경적인 의미로 ‘최소한의 시간, 그러나 충분한 시간’을 뜻한다. 성경에서 사흘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사막에서 물 없이 헤맸는데(탈출 15,22 참조) 이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말이고, 엘리사의 만류에도 예리코에서 온 예언자의 무리가 사흘 동안 모든 것을 동원하여 엘리야를 헛되이 찾았는데(2열왕 2,17 참조) 이는 찾을 만큼 찾았다는 말이고, 사흘 동안 유다인이 하느님께 탄원한 적이 있었는데(2마카 13,12 참조) 이는 하느님께 지를 수 있는 소리는 다 질렀다는 말이고, 사흘 동안 열두 살 예수가 성전에 머물렀는데(루카 2,46 참조) 이는 있을 만큼 있었다는 말이고, 사흘 동안 라자로가 무덤에 누워 있었다는 이야기도(요한 11,39 참조) 시체가 썩을 만큼 완전한 죽음이었다는 말이다. 이들의 용례가 보여주듯이 ‘사흗날’은 ‘충분히’ 시간이 흘렀음을 말해 준다.

또한 숫자 3의 경우, 십자가형이 ‘3시경’(마르 15,34)에 행해진 것은 시간의 절정에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뜻이고, 골고타에서 3명의 사형수가 처형(마르 15,27 참조)된 것은 예수님이 모든 사형수들을 대표했다는 말이 되고, 3명의 여인이 빈 무덤에 간 것(마르 16,1-8 참조)은 여인들이 다 갔다는 뜻이 포함된다. 3은 그런 ‘절정’ 또는 ‘충만’을 암시하고 있다.

나도 3을 굉장히 좋아한다. 책을 쓸 때도 꼭 한 챕터에서 세 단계로 얘기해야지 직성이 풀린다. 넷째까지 가면 하나를 버린다. 바로 여기서 배운 것이다.

나의 희망 철학 역시 이 3의 법칙이 적용된다. 한번은 모 잡지사 기자가 물었다.

“좋습니다. 감당하기 벅찬 절망이 덮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때도 희망을 고집할 것입니까?”

나의 답변은 이랬다.

“나는 나에게 딱 3일만 절망할 시간을 줄 것입니다. 소리를 지르든지, 울든지, 술을 퍼마시든지, 신세타령을 하든지 하면서 실컷 절망하라고 말입니다. 그러고 희망을 추슬러서 다시 벌떡 일어날 것입니다!”

이 ‘딱 3일만’의 희망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희망이여야 하지 않을까.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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