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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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66) 8가지 참 행복 - 행복하여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영의 가난’은 ‘자발적 가난’ 선택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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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움의 행복

살아오면서 들었던 강의 가운데 최고의 명강의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그 중 하나로 주저 없이 고 서인석 신부의 성서특강을 고른다. 5·18 광주사태 직후 전국 대학 휴교령이 내려졌을 때, 대학 4학년생이었던 나는 당시 정릉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에서 마련한 4박5일 ‘예언서’ 특강에 참여하였다. 그때 강사가 당시 서강대 교수로 있던 서인석 신부였다. 수려한 외모에 귀공자풍의 신부님은 미려하면서 힘 있는 논리로 구약과 신약을 종으로 횡으로 누비며 청중을 끌고 다녔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니 그것은 성령의 웅변이었다. 그 덕에 나는 강의를 듣던 중 어느새 내 가슴에 불이 타는 듯한 이상한 체험을 하였다. 일정이 끝난 후 정릉골짜기를 내려오면서 나는 실제로 내 가슴에 자주 손을 대어보았다. 그 뜨거움이 줄곧 사그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불덩이는 꼭 화로 속 숯불이 재에 묻혀 잠복해 있다가 대기에 노출되면 작열하듯이, 없는 듯이 잠잠하다가도 ‘복음’ 소리만 들리면 홀연 되살아나 뜨거워지곤 했다. 그게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 나는 서인석 신부님을 그의 책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명저를 통해 먼저 알게 되었다. 그 책은 ‘가난’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오늘날 내가 ‘가난’에 대해서 비교적 자유롭게 사유를 전개할 수 있는 것도 다 그 책 덕이다.

예수님께서 꼽으신 8가지 행복 가운데 첫째가 ‘가난’의 행복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반가우면서도 부담스런 선언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이 거북살스럽게만 여겨질 터다. 어차피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부자가 되지 말라’는 압력을 주는 것 같아 은근히 부담되는 것이다. ‘가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나는 이런 반응이나 표정을 다반사로 봐왔다.

그런데 방금의 말씀에서는 그냥 ‘가난’이 아니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 표현되어 있다. 이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크다. 그러기에 나는 사람들에게 그 말뜻을 일부러 묻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십중팔구 ‘욕심 없는 사람’, ‘마음을 비운 사람’, ‘겸손한 사람’ 등을 연상한다. 하지만 이는 정확히 여섯 번째 행복선언인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 해당하는 뜻풀이다.

그렇다면 저 말의 정확한 뜻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깊은 뜻을 알고 나면 누구든지 무릎을 치게 되어 있다. 막연한 추측이 명징한 깨달음으로 바뀌고, 부담감이 해방감으로 반전된다. 그 미지의 행복지대로 들어가 보자.

■ 원어에 담긴 뜻

우선 ‘마음’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프뉴마티’(pneumati)다. 이 단어는 본래 ‘영’, ‘바람’, ‘호흡’ 등을 나타낸다. 따라서 ‘마음’보다 ‘영’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마음과 영은 엄연히 다르다. ‘마음’이 가난한 것은 혼자의 사안일 수 있으나, ‘영’이 가난한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상태인 것이다.

‘가난’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프토코스’(ptochos)로서 ‘절대적 극빈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참고로 알아둘 것은 예수님께서는 본래 히브리어 방언 아람어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신약성경 집필 시대에 기록할 때, 당시 국제적 통용어였던 그리스어로 변환하여 기록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본래 의도하셨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어를 역으로 추적하는 것이 정확한 방법일 것이다.

본디 히브리어로 ‘가난’은 ‘에브욘’(ebyown)에 해당하는데, 이 단어는 ‘사회적으로 힘없는’, ‘착취당하는’, 그리하여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에게 붙여진다. 그러니까 이 가난은 ‘하느님께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궁핍’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가난의 주인공들로는 대표적으로 이방인, 고아, 과부 등이 꼽힌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 뒤에 든든한 ‘빽’으로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 뒤에 정말 하느님이 계신가? 계신다.

우선,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을 먹여 살리시기 위하여 십일조를 모아 매 삼 년마다 가난 구제 기금으로 사용하도록 분부하셨다(신명 14,28-29 참조). 또한 하느님은 이들을 위해 이른바 ‘약자보호법’을 제정해 주기까지 하셨다.

“너희가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더라도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 너희가 올리브 나무 열매를 떨 때, 지나온 가지에 다시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 너희는 포도를 수확할 때에도 지나온 것을 따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 되어야 한다”(신명 24,19-21).

심지어 하느님은 이들의 권리 수호를 위한 ‘보호자’ 역할까지 몸소 담당하셨다(신명 10,18 참조).

요컨대, 가난은 하느님께 의지해서 살 수밖에 없는 ‘하느님 의존성’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구약의 영성가들은 ‘가난’을 ‘영적인 태도를 표현하는 말’로 사용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영적인 가난을 이렇게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나도 가난한 사람이에요, 나도 돌봐주세요, 나도 하느님 도움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영으로(필자역)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루카 복음의 행복선언이 ‘영으로’가 없이 ‘가난한 사람’이라고만 되어 있는 데 반해, 마태오 복음에는 ‘영으로’가 첨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영으로’의 의미를 거듭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마음’이 감정의 처소라고 한다면, ‘영’은 의지의 처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영으로’라는 말은 ‘의지적으로’라는 말로 바뀌어도 무방하다. ‘의지적으로’라는 말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다는 뜻이다. 결국 ‘영으로’라는 말은 ‘자발적으로’라는 말이 되며, ‘영으로 가난하다’는 표현은 ‘자발적으로 가난하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곧 자신의 소유를 안전장치로 삼는 ‘부유’의 길을 택하지 않고, 하늘의 그느르심에 의존하면서 그저 주어지는 대로 누리며 사는 ‘가난’의 길을 택한다는 뜻이다.

결국, 이 첫 번째 행복선언에는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도 해당되지만, 하느님 앞에 자신의 영적 가난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도 포함된다.

행복의 이유로 예수님은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 말은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 곧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주어진 모든 좋은 것을 향유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차동엽 신부



가톨릭신문  201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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