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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4위 열전]<10>최필공ㆍ최필제ㆍ정인혁

‘영혼의 약’ 지으며 복음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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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0년대 전후 소의문(昭義門) 일대. 속칭 `서소문`으로 불린 소의문은 광희문과 함께 시신을 성 밖으로 운구하던 통로 구실을 했으며, 서소문 밖 형장에서만 124위 중 25위(조숙ㆍ권천례 동정부부까지 합치면 27위)가 순교했다. 1915년 일제의 경성도시계획에 따라 근처 성곽과 함께 철거돼 사진으로만 전해진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124위 가운데 의약업에 종사했던 인물은 여섯이나 된다. 최필공(토마스, 1744~1801)과 그의 사촌동생인 최필제(베드로, 1770~1801), 정인혁(타데오, ?~1801), 김종교(프란치스코, 1754~1801), 손경윤(제르바시오, 1760~1802), 김계완(시몬, ?~1802) 등이다. 다들 운명처럼 다가선 신앙을 기꺼이 받아들여 신앙의 여정을 함께한 `의약 6인방`이었다. 이번호에선 최필공과 최필제, 정인혁을 조명한다.

 맨 처음 신앙을 받아들인 인물은 1790년 교리를 배워 입교한 최필공ㆍ필제다. 의원 집안 출신인 최필공은 관직도 없는 데다 가난해 46세가 될 때까지 혼인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성품이 너그러웠고 솔직해 사람들의 신망이 컸다. 입교하자마자 교리 실천에 열성을 보인 최필공은 공공연히 교리를 전파했다. 오늘날로 보면 일종의 `거리 선교`를 한 셈이다. 이 바람에 박해자들의 주목을 받은 그는 신해박해(1791)가 일어나자마자 체포됐다. 당시 체포된 동료들은 배교한 뒤 석방됐으나 최필공만은 마치 목석 같이 신앙을 고수했다. 하지만 정조의 유화책에 마음을 고쳐먹고 궁중에 바치는 각 지방 약재들을 검사 감독하는 종9품 관직인 `심약(審藥)`으로 관서, 지금의 평안도에 파견돼 혼인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천주께 등을 돌린 심약함을 자책하다가 3년 뒤 심약직을 사임한 그는 서울로 돌아와 편자동에 살면서 지금의 서울역 앞길인 도저동에 약방을 마련하고 다시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체포ㆍ투옥된 그는 1801년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약방을 운영하며 살던 최필제 또한 후덕하고 진실한 성품에 어질기로 짝이 없었던 인물로 전해진다. 그가 파는 약은 값이 싼데다 다른 약방보다 약재도 훨씬 좋아 신용이 깊었다. 26살이나 위였던 최필공도 어떤 일을 하든지 그에게 의견을 들어본 뒤 실천에 옮겼다. 최필공의 아우 중 신자들을 욕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도 "최필제만은 본받을 만하다"고 할 정도였다. 최필제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됐다가 배교한 뒤 석방됐으나 이후로는 다시 교회로 돌아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 일을 돕고 교리교육과 함께 교리 전파에 힘썼다. 그러다가 1800년 12월 19일 자신의 집에서 체포됐으며, 1801년 5월 14일 서소문 밖에서 31세의 젊은 나이로 참수됐다.

 1790년 무렵, 최필제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정인혁은 형제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치고 교회 가르침대로 제사도 폐지했다. 신해박해 때 형제들과 함께 체포돼 형조로 끌려간 정인혁은 형제들과 달리 형벌에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이에 가족이 회유하도록 관리들이 사흘 기한을 두고 집으로 돌려보내자 그의 맏형은 형조에 들어가 "우리 집안에선 앞으로 누구도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을 것이다"고 다짐했다. 이에 형조에선 이 말을 믿고 정인혁을 다시 부르지 않았다. 이때 그는 더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지 못한 걸 뉘우치고 더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했고, 최필공 등과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교리를 연구하는 데 몰두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체포돼 최필제와 함께 참수됐다.

 이들 중 사촌 사이인 최필공ㆍ필제 형제는 특히 초기 교회에서 의원이나 약방을 운영하던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생각과 말,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세태 속에서 입신양명이나 부귀영화, 만수무강을 삶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이들에게 이들 형제의 삶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었을 터다. 그러나 영혼의 약을 지으며 영적 수행의 삶을 살던 이들 형제는 `나의 보상은 하느님께 있다`는 믿음으로 오롯이 천주님만 바라보며 사랑, 끝내는 순교의 길을 걸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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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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