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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결정<21>조용삼

못생긴 외모로 조롱받지만, 고운 심성 지키며 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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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삼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중 가장 ‘보잘것없는’ 인물로는 조용삼(베드로, ?∼1801)이 꼽힌다. 물론 신분으로야 하급 양반 출신이었지만, 집이 가난한 데다 몸도, 마음도 약했으며 외모조차 볼품이 없었고 늘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됐다. 얼마나 가난했던지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 슬하에서 자라야 했다. 그래서인지 서른 살이 넘도록 그는 혼인을 하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결국 두 아들, 용삼ㆍ호삼과 함께 여주 점들(현재의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금사2리)에 있던 임희영의 집에 들어가 살았다. 이때 조용삼 일가는 인생의 분기점을 만난다.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과의 만남을 통해 교리를 배우고 신앙을 접하게 된 것. 모두가 그를 조롱해도 스승만은 그의 열심을 칭찬하고 신앙의 길로 이끌었다. “가장 보잘것없는 나에게 그러한 은총을 주시어,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를 민족들에게 전한”(에페 3,8) 사도 바오로만큼은 아니었지만, 순교를 통해 그는 교우들에게 크나큰 공경을 받았으며 모든 이들이 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또 어린아이와도 같은 심성과 순결함으로 그는 공동체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그가 체포된 것은 1800년 경신년 4월 15일이다. 예수 부활대축일을 맞아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의 집으로 간 그는 남한강변 양섬에서 이중배(마르티노, ?∼1801), 원경도(요한, 1774∼1801) 등과 함께 대축일 행사를 갖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예비신자에 불과했지만 그의 용기는 체포와 함께 곧바로 빛을 발했다. 혹독한 문초와 형벌에도 그가 굳건히 신앙을 고백하자 박해자들은 화가 나 더 세게 매질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에 박해자들은 마지막으로 그의 부친을 끌어내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부친을 당장 죽여 버리겠다”고 말하며 더욱 혹독한 매질을 했다. 이 때문에 굴복한 조용삼은 관아를 걸어나오다 이중배를 만나 그의 권면을 듣고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아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한다. 이후로는 그의 신앙이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이어 경기감영으로 끌려가 또 다시 문초를 받던 중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신자들이 속속 붙잡혀 오는 와중에 그는 옥중에서 세례를 받는다. 그해 2월에도 경기감사 앞에 끌려가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약해진 그의 몸은 더는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그해 3월 27일 숨을 거둔다.

황사영(알렉산델, 1775∼1801)의 「백서」는 조용삼이 옥중 삶에 관해 이렇게 전한다.

“옥에 갇혀 있던 11개월 동안 그의 아름다운 언행과 아름다운 선행은 너무나 많았는데, 나는 그것을 기억할 수 없어 상세하게 적지 못하지만 훗날 그것을 찾아보려 한다.”

“하늘에는 두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기에 원하는 건 오직 천주님을 위해 죽는 것뿐”이라는 조용삼의 조용한 고백은, 늘 흔들리고 늘 닫혀 있고 늘 배반하는 우리네 믿음살이에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언제나 십자가에 있다는 식별의 잣대를 안겨준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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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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