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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결정 <22>정복혜·김조이·심조이·이조이

슬픔 딛고 신앙 지킨 과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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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까지만 해도 남편을 잃고 홀로 사는 여자를 가리키는 ‘과부’는 신분에 따라 호칭이 달랐다. 양반 과부는 성에 ‘씨(氏)’를 붙였고, 양인 출신 과부는 성 뒤에 ‘조이(召史, 이 한자표기는 이두여서 ‘소사’라고 읽지 않고 ‘조이’라고 읽는다)’를 붙였다. 노비 출신 과부는 ‘비(婢)’ 또는 아무런 호칭을 붙이지 않고 이름을 불렀다. 103위 성인 가운데서 과부 출신 성인은 유조이(체칠리아, 1761∼1839), 우술임(수산나, 1803∼1846) 등 17위나 됐다.

▲ 정복혜
 
124위 순교자 가운데서도 과부가 있다.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정복혜(칸디다, ?∼1801),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 김조이(아나스타시아, 1789∼1839), 심조이(바르바라, 1813∼1839), 최조이(바르바라, 1790∼1840), 이조이(막달레나, 1808∼1840) 등이다. 이들 가운데 이미 소개한 최조이를 제외한 과부 출신 순교자들을 소개한다.

한양 근처 양인 출신인 정복혜는 1790년 중인 이합규를 만나 교리를 배우고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한 뒤 교회 일에 특히 열심을 보였다. 또 과부가 된 이후에는 한신애(아가타, ?∼1801), 윤운혜(루치아, ?∼1801) 등과 함께 신자들 사이의 연락을 도맡았고, 교우들과 함께 교리를 강습하거나 교우들이 집필한 교회서적을 보급하며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썼다.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체포돼 1801년 5월 14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 김조이
 
충청도 덕산 양인 출신인 김조이는 이성삼(바오로)과 혼인한 뒤 남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해 ‘성가정의 본보기’가 된 인물이다. 1827년 정해박해 때는 박해를 피했지만, 기해박해 때 전라도 광주에 귀양 가 있던 홍재영(프로타시오, 1780∼1840)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체포돼 전주로 압송됐으며 혹독한 문초를 받다가 1839년 10월께 옥중 순교했다.

▲ 심조이
 
인천의 양반 집안 출신인 심조이는 할아버지(홍낙민 루카, 1751~1801), 아버지(홍재영 프로타시오, 1780~1840)에 이어 3대가 순교한 홍봉주(토마스, 1814~1866)의 아내로, 지능이 낮아 아무리 노력해도 중요한 교리 외에는 외지 못했지만 신앙만은 말할 수 없이 굳셌다. 특히 자선 실천에 열심이었던 인물로 전해진다. 기해박해 당시 시아버지 홍재영의 집에 피신했다가 김조이 등과 함께 전주로 끌려가 1839년 11월 11일 옥중 순교했다.
 
▲ 이조이
 
출신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장성한 뒤 금산에 살던 김성서(프란치스코)의 아우와 혼인한 이조이는 19세 때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됐다. 그러나 죽기 전 수계를 열심히 하라는 남편의 당부를 따라 자신의 영혼 구원과 대ㆍ소재(금식재ㆍ금육재) 실천, 시부모 봉양, 애덕 실천에 전력을 다했으며, 특히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는 데 헌신했다. 역시 기해박해 때 홍재영의 집에서 체포돼 전주로 압송됐으며, 1840년 1월 4일 참수형을 당했다.

남편을 잃고 홀로 됐지만 이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신앙 공동체 속에서 이들은 죽음을 넘어선 사랑의 승리를 이뤄냈고, 보통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힘입어 거둔 승리의 은혜를 증거하고 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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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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