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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 두려워 순교사실 숨기고 살아

시복의 기쁨 안은 124위 후손들(4)- 윤지충 후손 윤풍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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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지충 복자 후손 윤풍무씨가 번동성당에 걸린 교황 방한 축하 플래카드 앞에서 웃음을 짓고 있다. 이힘 기자

“감격스럽습니다. 순교자 후손인 것이 자랑스럽고 뿌듯합니다.”

7일 서울대교구 번동성당에서 만난 윤풍무(스테파노, 72)씨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광화문광장에서 집전하는 ‘124위 순교자 시복식’을 앞둔 소감을 말했다. 그는 “124위 순교자가 복자가 되기까지 노력을 아끼지 않은 한국교회 모든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윤씨는 이날 복자가 되는 124위 순교자 가운데 대표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 1759~ 1791)의 방계 7대손이다. 그는 “그동안 할아버님 시복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왔는데 드디어 소원이 이뤄졌다”며 감격스러워했다.

한국 천주교회 첫 순교자로 알려진 윤지충은 10년 뒤인 신유박해(1801년) 때 같은 순교의 길을 걸은 동생 윤지헌(프란치스코, 1764~1801)과 함께 이번 시복식에서 복자 반열에 올랐다. 1759년 전주부 양양소면에서 출생한 윤지충은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1784년 서울에 올라와 김범우(토마스)에게 「천주실의」 「칠극」을 빌려 필사하면서 천주교를 처음 접했다. 1785년 을사 추조 적발 사건 때 소장하던 교리서를 모두 불태웠으나, 이듬해 고종사촌인 정약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어머니와 동생에게 교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어머니가 선종하자 구베아 주교 사목서한에 따라 제사를 거부하면서 신자인 것이 발각돼 1791년 전주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윤씨는 “할아버지가 신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순교하시기까지는 고종사촌 아우 정약종ㆍ약용 형제의 뛰어난 학문 영향력 덕분이었다”며 “이번에 정약종과 아들 정철상이 함께 시복돼 더욱 뜻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윤지충 순교 이후 후손들은 또 언제 어디서 박해당할지 몰라 순교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살아왔다고 전했다.

그는 윤지충이 해남윤씨(海南尹氏)라면서 “한꺼번에 두 복자가 탄생하게 된 것은 가문의 영광”이라고 웃음 지었다. 해남윤씨 종친회에 윤지충ㆍ지헌의 시복 소식을 최초로 전하는 등 그동안 순교자의 신앙과 삶을 세상에 알리는 노력을 펼쳐온 그는 앞으로 신자 종친들과 함께 ‘해남윤씨 신자 모임’(가칭)을 만드는 게 꿈이다.

그는 40대 중반에 세례받았다. 독실한 아내(기정선 가타리나)와 딸(윤원정 로즈마리)이 그를 하느님 자녀로 이끌었다. ‘아빠도 세례받으라’는 딸 부탁에 “5년 있다 받겠다”고 했는데, 5년 뒤에 약속을 지켰다. 영세 뒤에는 서울 수유1동ㆍ도봉산ㆍ번동본당 등에서 레지오 마리애 단원, 사목회 총무, 사목회 부회장, 사목회장 등으로 봉사해왔다.

“‘만약 내가 박해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순교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순교할 자신이 없습니다. 할아버지와 같은 순교자들 믿음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순교자 후손으로 앞으로 더 잘 살아야겠다고 늘 다짐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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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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