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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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사랑을 알려주신 할머니

2021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 신앙 수기 사랑상 대학(원)생 부문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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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심어주신 할머니

초등학생 때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어머니는 지방에서 홀로 경제적 부담을 지셨기 때문에 저와 형은 외조부모님이 키워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불안정하게 자랄 수 있었지만, 두 분의 사랑 안에서 몸과 마음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할머니는 저희 형제에게 신앙을 물려주셨습니다.

할머니를 따라 성당에 다녔습니다. 교중미사에 따라다니며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기도와 성가를 따라 하곤 했습니다. 미사 때 듣는 가톨릭 성가가 얼마나 좋았던지, 일요일 저녁 8시면 가톨릭평화방송 라디오에서 들리는 미사에 형과 함께 귀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평소에도 성가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다니곤 했습니다.

성당에서 열리는 바자, 운동회, 성지순례 등의 행사에도 따라다녔습니다. 할머니께서 레지오할 때 따라갔던 어느 날은 혼자 성당을 돌아다니며 놀다가 칠판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대단치도 않은 그림에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받고는 우쭐해 했던 기억도 납니다. 성당은 재밌고도 신기한 놀이터였습니다.

3학년이 되던 해에는 할머니의 권유로 첫영성체를 받았고, 이후 토요일마다 초등부 주일학교에 다녔습니다. 토요일은 학교 친구들의 생일파티가 자주 있었지만 그보다는 성당에 가기를 택하곤 했습니다. 성당에 가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당에 다녀오면 언제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가톨릭교회에 속해있다는 것, 세례를 받고 성체를 모실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꽤나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예기치 못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옆 본당으로 교적을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집이 옆 본당 구역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그 본당으로 다녀야 했습니다. 새로 다니게 될 본당은 너무 낯설었고, 특히 주일학교에 찾아갈 용기가 안 났습니다.

당시 중고등부 미사는 주일 9시에 있었는데, 학생들은 지하에서 보좌 신부님과 미사를 했고, 어른들은 2층 성전에서 주임 신부님과 미사를 했습니다. 같은 시간에 두 곳에서 미사가 있었던 것이었는데, 저와 형은 중학생으로서 주일학교 미사에 가는 게 마땅했지만 도저히 지하에 내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또래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지하에서 들려왔지만, 내성적인 저는 먼저 다가가기가 겁나고 두려웠습니다. 원래 여기 있던 친구들의 무리에 끼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차마 지하에 가지 못하고 2층 성전에서 어른들과 미사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 미사 도중 주임 신부님께서는 학생이 왜 여기 있냐며 저희를 혼내셨습니다. 이에 상처받은 저와 형은 아예 미사를 안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인생에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 냉담 시기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당에 다녀오신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일학교 여름 캠프에 저희 형제를 신청하셨다고 말입니다. 우리와 이야기도 안 나누시고 덜컥 신청해버리시다니!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고 화도 났지만 차마 할머니께 뭐라 떼쓰지는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끙끙거리던 제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런데 캠프 오리엔테이션에 다녀오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곳에서 선생님, 형, 누나, 또래 친구들을 처음 만났는데 모두 저를 환영해줬기 때문입니다. 8월 4일부터 7일까지 있었던 3박 4일의 도보 성지순례 캠프였는데, 그때 그 캠프는 지금까지 날짜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버린 큰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캠프를 가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캠프 기간 함께 걷고, 기도하고, 노래하고, 먹고, 자고, 웃고, 이야기 나누던 시간이 참 재밌었습니다. 캠프를 통해 많은 사람과 친해진 덕분에, 바로 그다음 주일에는 지하로 내려가 중고등부 미사에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학년별 교리에도 참여했고, 중고등부 풍물부에도 가입했습니다.

그로부터 매주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2학년까지 매년 개근상을 받았으며 학생회장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제 삶의 반은 성당이었습니다. 학교를 마치면 성당에 갔고, 주일에는 성당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 모든 게 다 중학교 1학년 때 할머니께서 중고등부 여름 캠프에 저희를 덜컥 신청해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계획이 다 있으셨던 것입니다.



열매를 맺은 믿음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니던 저희 형제는 다 커서 성인이 되었습니다. 형은 신학교에 들어갔고 저는 일반 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보청기 하려고 마련하셨던 돈을 제 등록금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본당에서 중고등부 주일학교 교사를 시작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게 된 것은 그저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한 가지 동기가 있다면, 10대 때 주일학교에서 받은 사랑이 많아서 그것을 갚고 싶었습니다. 다른 친구들도 이곳에서 많은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자연스레 신앙을 얻을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특히 처음 성당에 오면 친한 친구들의 무리에 섞이는 게 얼마나 어색하고 어려운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그런 학생들의 모습이 더 눈에 잘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늘 처음 온 학생들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습니다. 관심과 사랑으로 맞이하면, 그들은 마치 제가 그랬던 것처럼 점차 밝은 모습으로 변화했습니다. 돈보스코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아이들을 그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려고 했습니다.

매주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그만큼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르치면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공부하고 기도하며 묵상할수록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셨던 사랑에 대해 매료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에 대해 가르치는 일이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어릴 적에 할머니께서는 성경을 꽉 짜면 사랑밖에 안 남는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과 교리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세상도 사랑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다 신비였습니다. 평생 이 사랑을 이야기하며 살다 죽고 싶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가진 채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하며 방황하다 보니 어느새 20대가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대학교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간호대학으로 편입하였고, 지금은 미래의 간호사가 되기 위하여 공부하고 있습니다. 형이 영의 건강을 돌본다면, 저는 육의 건강을 돌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늦게 시작한 공부이지만 열정을 갖고 재밌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에 대해 공부할수록 그 오묘한 신비로움에 놀라지 않을 수 없고, 하느님을 경외하며 찬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할머니께서 지어주신 라파엘이란 세례명처럼, 누군가를 치유해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 유준모씨 할머니의 일기장 사진.



사랑을 알려주신 할머니

어느 날 할머니 댁에 갔을 때 할머니의 일기장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진 않았고, 그날그날 있었던 일이 짤막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이전에 방문했던 날의 일기를 보게 되었는데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6월 3일 일요일. 나파엘이 어제 와서 오늘 감. 항상 보아도 예뿌다.”

눈물이 났습니다. “어제 와서 오늘 갔다”라는 내용은 펜으로 쓰였고, 그 밑에 “항상 보아도 예뿌다”라는 말은 연필로 쓰여 있었습니다. 한 줄 쓰고 나서 나중에 다시 또 한 줄 더 채워 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나서 얼마 뒤에 문득 손주가 그리워져서 다시 한 줄 덧붙이셨나 봅니다. 다 큰 손주 녀석을 두고 ‘항상 보아도 예쁘다’라는 것은, 어떤 크기의 사랑인지 저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조금 비뚤게 쓰인 글씨, 예뿌다라며 틀린 철자는 더 가슴을 저리게 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눠주시고, 보여주시고, 알려주셨고, 그 사랑으로 저희를 키워내셨습니다.

저희 안나 할머니는 이처럼 믿음과 사랑을 알려주신 분입니다. 늦게 배운 컴퓨터로 성경을 4번이나 필사하신 할머니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시고, 기도로 하루를 마치십니다. 할머니께서는 당신의 삶으로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또 할머니께서 저희 형제를 얼마나 예뻐하셨는지 압니다. 늘 좋은 것만 주려 하셨던 것을 압니다. 신앙을 선물해주신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좋은 것을 전해주고 싶은 그 사랑 말입니다. 할머니에게서 배운 믿음과 사랑을 저희 형제는 이제 세상과 이웃에게 나누려 합니다.





유준모 라파엘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1-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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