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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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식에서 직접 왕관을 쓰는 나폴레옹, 교황은 허수아비일뿐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 (52)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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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의 대관식’(1805~1807년), 프랑스 루브르.



이번에는 잘 알려진 작품을 소개한다.

여전히 나폴레옹과 비오 7세 교황의 관계는 긴장 국면에 있었다. 지난 회에서 살펴본 ‘1801년의 종교협약’은 나폴레옹의 일방적인 파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1803년 4월 8일 프랑스 정부의 ‘부속 법령’으로 결국 무효로 끝났다.

그러고도 나폴레옹은 1804년부터 자신의 공식 황제 즉위식을 위해 교황과 협상하기 시작했다. 비오 7세 교황은 망설였다. 그러나 파리 시민들을 생각하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있을 즉위식 이후 파리 방문을 4개월 한다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황제의 즉위식은 예측했던 대로 교황청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황제의 정치적인 계획에 최대한 이용당한 모양새가 되었다.

소개하는 작품은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양식의 화가며 정치인이기도 했던,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가 그린 ‘나폴레옹의 대관식’(1805~1807년 작)이다. 루브르에 있다. 나폴레옹은 제정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하여 네 개의 초대작을 명했는데, 그중 다비드가 ‘생 드 마르스에서의 군기 수여식’과 이 작품을 완성했다. 작가에 대해서는 49회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본지 1625호 8월 15일 자)에서 언급한 바 있어, 여기선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나폴레옹은 반혁명 세력을 봉쇄하기 위해 스스로 황제가 되겠다는 계획을 국민투표에 부쳤고, 압도적인 찬성을 받았다. 국민은 10년 이상 지속된 혁명과 전쟁에 지쳐 있었고, 이럴 바에야 차라리 강력한 인물이 나와 하루빨리 안정을 찾아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나폴레옹이 합법적으로 프랑스 정치의 최고 수장으로 떠오르게 된 이유다. 그리고 1804년 12월 2일, 자신의 대관식을 위해 비오 7세 교황을 파리로 불렀다.



그림 속으로

대관식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교황은 많은 고민 끝에 힘들게 먼 길을 왔지만, 막상 대관식에서 교황이 할 일은 거의 없었다. 대관식에 앞서 교황은 나폴레옹에게 도유식을 했고, 황제는 자신을 ‘도유한 자(그리스도)’로, 신의 뜻을 이 땅에 펼치는 신성한 통치자라고 판단, 이후 예식을 직접 주도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손으로 관을 집어 머리에 쓰고, 이어서 조제핀에게 황후의 관을 씌어주었다. 교황은 나폴레옹 뒤에 앉아서 대관식을 축복할 뿐이었다. 황제는 교황의 권한을 철저하게 저지하는 동시에 자기 백성에게 교회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선전용으로 최대한 이용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교황이 집전하던 황제의 대관식을 스스로 함으로써, 교황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동시에 황제를 만드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임을 만천하에 천명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유럽의 최고 권력이 바뀌는 것을 의미했다.

다비드는 작품에서 그 순간을 잘 포착했다. 가운데 깊숙이 들어간 높은 곳에 황제의 어머니와 가족들이 모여 있고, 그 아래에 장군과 고관들이 줄지어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초상화처럼 모두 정확하게 그려 넣었다. 그림은 황제를 중심으로 가족과 제국의 지휘관들이 단합하여 새로운 체제에 봉사한다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비오 7세 교황이 얻은 것은

비오 7세 교황이 대관식에 참여하고 얻은 소득은 성직자들을 위한 소액의 지원금과 유서 깊은 수도원 2~3개를 재건하고, 해외 선교를 위한 신학교를 건립하며, 일부 수도회의 활동을 인정하는 게 전부였다. 이런 빈약한 소득 중에도 프랑스 국민의 열렬한 지지와 환호를 받은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물론 나폴레옹은 그 점을 몹시 불편하게 여겼다. 이에 교황을 더 심술궂게 대하게 되었다. 비오 7세는 프랑스에서 신앙이 다시 싹트고 있다고 판단했고, 로마로 돌아와 이듬해 1805년 5월 16일, 추기경회의를 소집하여 프랑스 여행의 긍정적인 측면을 설명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통치 기간이 지속되면서 프랑스의 압박은 교황령을 모두 프랑스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고, 교황청에는 연 200만 프랑을 지급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비오 7세 교황은 강력히 항의했고, 나폴레옹은 1808년 2월 미올리스 장군을 보내 로마를 점령했다. 한 달 후 안코나, 마체라타, 페사로, 우르비노를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시켰다. 물론 1805년부터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공화국을 왕국으로 개편하고 스스로 왕이 된 상태였다.

프랑스의 이런 행보에 주목한 주변국들 곧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는 반-프랑스 동맹을 맺었고, 나폴레옹은 18만 명 에 달하는 대군으로 오스트리아군을 울름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아우스터리츠에서 격파했다. 이런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파리 시내에 두 개의 개선문(카루젤과 에투알)을 건설하기도 했다. 이후 나폴리 왕국, 네덜란드, 베르크-클레브 공국, 신생 베스트팔렌 왕국, 프로이센, 이베리아반도 등도 침공해 족벌 정책으로 모두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은 대륙봉쇄령으로 압박했고, 러시아와는 힘겨운 전쟁을 계속했다.

그런 가운데 1809년 5월 11일 쇤부른에서 나폴레옹은 로마와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교황령의 모든 영토를 프랑스 제국에 합병시키겠다고 선언했다. 1809년 6월 10일 로마 ‘천사의 성’에는 프랑스 국기가 게양되었다.



프랑스군에 끌려간 교황


비오 7세 교황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은 황제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로마를 침범한 사람들에 대한 파문 교서를 발표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나폴레옹은 1809년 7월 5일과 6일 사이 밤, 퀴리날레 궁전의 문을 부수고 들어와 비오 7세를 납치했다. 야밤에 침입하여 교황령을 프랑스에 넘기라고 추궁하는 나폴레옹의 사절에게 비오 7세는 그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할 수 없고, 해선 안 되고, 하고 싶지 않습니다!(Non possiamo. Non dobbiamo. Non vogliamo!)”

결국, 교황령은 모두 프랑스에 합병되고, 로마는 다음날에야 교황이 로마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비오 6세 교황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프랑스군은 교황을 끌고 백성들 몰래 다니느라 라치오와 토스카나 지방을 거쳐 42일 만인 8월 17일에야 사보나에 도착했고, 후에 파리 근교 퐁텐블로에 감금했다.


나폴레옹의 쇠락과 교황의 로마 귀환

1813년 10월 19일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했다. 교황은 그때까지 퐁텐블로에 있었고, 나폴레옹은 교황을 지지하는 동맹군이 교황을 구하러 오기 전에 사보나 왕국으로 포로의 신분으로 넘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1814년 1월 23일 비오 7세는 주교 복장을 하고 사적인 형태로 퐁텐블로를 떠났다.

그는 반-보나파르트가 절정에 달한 론 계곡을 지나 니스로 인도되었다. 포로자의 긴 여정은 어느새 승자의 여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감격한 군중은 프랑스 남부를 통과하는 노(老) 교황에게 몰려들었다. 2월 16일, 비오 7세는 사보나에 도착했다. 사보나에 있는 동안 교황은 나폴레옹의 퇴위(3월 17일)와 로마가 프랑스의 통치에서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폴레옹은 퇴위하면서 마지막 명령으로 교황을 5년 간의 포로 생활에서 풀어주게 한 거로 보인다.

비오 7세는 3월 31일 볼로냐를 거쳐, 과거 주교 시절, 자신의 교구였던 이몰라에서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주례하고, 포를리로 향했다. 거기서 백성의 열렬한 환호와 안드레아 브라티 주교의 환대를 받았다. 브라티 주교는 한때 프랑스 정부 편에 서서 교황을 비판했던 인물이었다. 교황은 그 자리에서 주교를 용서하고, 라벤나를 거쳐 고향 체세나에서 잠시 머물렀다. 5월 24일 눈물로 맞이하는 로마 백성의 환호 속에 로마로 입성했다. 로마 백성이 하루아침에 목자를 잃은 지 4년 10개월 9일 만에 목자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비오 7세가 로마로 귀환한 후, 우선으로 한 일은 8월 7일 칙령 「교회에 대한 모든 염려(Sollicitudo omnium Ecclesiarum)」를 통해 예수회를 복구했다. 나폴레옹이 강제로 빼앗았던 영지는 1815년 빈 회의에서 교황청 국무성 장관 콘살비(1757∼1824) 추기경이 되찾아 왔다.

비오 7세 교황은 나폴레옹에 의해 육체적, 도덕적으로 힘든 재임 시기를 보냈다. 선임 비오 6세 교황부터 그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 학대를 받은 셈이다. 그렇지만 그는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마지막 유배 생활을 할 때, 그의 노모를 보호하고 그의 가족들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돌봐주었다.



김혜경 (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부산가톨릭대 인문학연구소 연구 교수)

▲ 김혜경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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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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