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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19)1856년 9월 13일 소리웃에서 보낸 열두 번째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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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년 기해박해 순교자 73명의 행적을 번역했던 최양업은 이후로도 순교자의 행적을 조사하는 데 열정을 기울였다. 최양업은 시복을 위한 자료조사에 그치지 않고 조선사회 안에서 순교자들이 맞닥뜨린 상황과 신앙의 위기, 그리고 순교자들이 이를 어떻게 극복해 나갔는지를 조명했다. 1856년 9월 13일 소리웃에서 쓴 그의 열두 번째 서한에는 신자들의 가련한 처지와 안타까운 현실이 자세히 묘사된다.

서한이 작성된 소리웃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루카) 소장은 오두재(현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인근에 있던 교우촌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경기도 용인 손골(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상손곡)의 교우촌 혹은 이천 소리울(현 이천시 모가면 송곡리)이라는 의견도 있다.


■ 배교 협박에 “우리는 죽어도 그런 큰 죄악 범할 수 없다”고 말한 신자들

충청도 진밧(현 충남 공주 사공면 신영리)에서 사목하던 최양업은 위험한 상황에 맞닥뜨린다. 새벽녘 세례성사를 집전하려던 찰나 백 명이 넘는 포졸들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문을 빙 둘러싼 그들은 온갖 폭력으로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 하고 신자들은 죽을힘을 다해 그들을 물리치느라고 일대 난투극이 벌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쌍방 간에 부상자까지 발생했습니다. 저는 몇몇 신자들과 함께 방에 있었는데, 그들의 도움으로 급히 미사 짐을 챙겨 뒷창문으로 재빨리 빠져나와 캄캄한 밤을 이용해 산으로 도망쳤습니다. 저와 신자들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바위와 가시덤불 사이로 허둥지둥 이리저리 헤매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마을의 유력자 다섯 명이 체포됐다. 이 중 두 명은 고을에서 높은 관리이거나 양반 가문이었다고 최양업은 전한다. 천주교의 진리를 따르고자 부와 명예가 보장된 고향을 떠나 산속 교우촌으로 들어온 것이다.

나머지 세 사람은 예비신자였지만 배교하라는 관원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증거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임금님을 비방해도 죄악이 되거늘 하물며 우주 만물을 지배하시는 하늘의 임금님이신 창조주께 욕을 한다는 것은 천상천하에 용납받지 못할 극악 대죄”라며 “우리는 죽어도 그런 큰 죄악을 범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조건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 산속으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어든 신자들. 가련한 그들의 처지를 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제 최양업은 비통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저에게 여유가 있다면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저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니 한숨밖에 나올 것이 없다”고 적는다.


■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다 하느님 곁으로 간 최해성 요한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복자 최해성(요한)에 대한 이야기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충청남도 출신인 최해성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하므로 모든 이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최양업은 설명한다.

최양업은 “최해성 요한은 그런 가난 중에서도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애긍 시사와 자선 사업 등을 궐하지 아니하였다”며 “천주교의 모든 본분을 이행하는 데 뛰어난 열성을 다하고, 신자들을 격려하며 비신자들을 권면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고 밝힌다.

작은 교우촌에서 모든 이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착한 표양을 간직한 최해성은 삶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이다.

1839년 기해박해가 날로 악랄해지자 부모와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최해성 요한. 교회 서적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집으로 가던 그는 포졸들과 만나 관가로 끌려간다.

“네가 천주를 배반하면 나라의 착한 백성이 되겠고 너의 모든 재산을 되돌려줄 것이며 상금까지도 보태줄 것”이라는 관장의 회유에도 최해성은 “온 고을을 다 주신다고 하셔도 하느님을 결단코 배반하지 않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드러낸다.

포졸들과 군중들에게 숱한 매질과 행패를 당한 최해성에 대해 최양업은 “요한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살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뼈가 드러났으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붙은 그의 영혼은 기쁨으로 용약했다”고 전한다. 1839년 9월 29일 결국 최해성은 스물아홉의 나이로 순교한다.

최양업은 서한을 마무리하며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이렇게 청한다. “다른 것보다 하느님 자비가 저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저와 저의 가련한 조선 신자들을 신부님의 사랑이 넘치는 기도에 다시 의탁합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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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2-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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