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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47) 발 없는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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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王家衛) 감독의 영화 ‘아비정전’(阿飛正傳)에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발 없는 새가 있어.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을 때가 있는데, 그건 죽을 때야.”

안정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심리적 균형을 잃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의식의 흐름입니다. 이러한 양가성(兩價性) 전(前) 단계에는 대개 모든 에너지를 살아남기 위한 투쟁에 쏟은 후 얼마간의 성취감을 경험하고, 또 지금까지와는 다른 긍정적 경험을 통해 얼음같이 차가웠던 마음에 온기가 스며드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처음 맛본 이 안락함이 일종의 저주처럼 작용합니다. 긴장이 풀리면서 균열이 생기고 간신히 버티고 있던 균형상태가 무너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들은 찰나적으로 느끼는 안락함을 지속시키는 방법으로 죽음을 상기하며, 순간이 영원이 되는 곳으로 자신의 생을 던지고자 합니다.

S 역시 비슷한 서사를 보여줍니다. S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폭력과 학대에 시달렸습니다. 상급학교 진학을 원치 않았던 부모와 뜻을 달리했던 S는 도망치듯 상경하여 억척같이 홀로 일하며 고교와 대학과정을 마쳤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동기들 가운데 승진도 제일 빨랐습니다.

몇 년간 정신없이 일한 후 평소 동경해왔던 해외여행을 떠났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여행 도중 한 남자를 만났고, 서로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동거를 시작했고 남자가 사려 깊고 따뜻한 사람이었기에 S는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S는 전에 없던 급격한 감정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불현듯 자신이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면 전혀 다른 상태로 돌변했습니다. 자신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주체할 수 없는 자살 충동이 올라왔습니다.

S는 자살 충동이 반복되면서 과거 자신이 가졌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점차 옅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의식하면서 손목을 긋다가 이후에는 무의식적으로 손목을 긋고, 나중에는 목을 매고 번개탄을 피우는 등 그 정도가 심각해지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S는 매일 정상적으로 출근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는 반복적으로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마치 삶과 죽음이 평행선을 달리는 것 같았습니다. 직장에서는 여전히 열심히 일했고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봐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집에 오면 전혀 다른 사람인 듯 행동했습니다. 마치 ‘발 없는 새’가 안착과 죽음을 동일시하는 것처럼 여행, 남자친구, 가학적인 아버지의 사망 등 자신이 원하는 것들이 실현된 순간, 죽음을 향해 폭주하기 시작했습니다.

S는 자살 충동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게 된다고 했습니다. 남자친구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일말의 죄책감 같은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누구 때문에 자살하지 말아야겠다는 식의 생각은 언젠가부터 사라졌습니다. 아무런 감흥이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상담을 통해 S 스스로 찾은 답은 과거 자신이 버티기 힘들었던 상황들에 대해 무조건 참고 그냥 지나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쉼 없이 날기만 했던 그 새처럼 말이죠.


황순찬 베드로 교수
인하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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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3-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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