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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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2) 생명의 못자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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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주에 와서 20년이 흘렀다. 현직에 있을 때나 은퇴한 후에나 내가 맛보는 가장 큰 기쁨과 휴식은 숲길을 걷는 일이다. 그런데 그동안 수십 년 된 나무들이 수없이 잘려 나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속이 쓰리다. 내가 몇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큰 충격적 사건은 자태가 너무 아름답고 장엄한 소나무가 어느 날 갑자기 잎이 시들어 가더니 얼마 후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일이다.

이 노송은 보기에 수명도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그 줄기가 옆으로 두어 번 휘어서 하늘로 뻗어 오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품격을 갖춘 국보급 보물이었다. 그런데 이 노송이 제주대학교로 들어가는 길과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넘어가는 중앙로가 교차하는 도로변에 서 있었고 중앙로 확장 공사로 인해 길 한복판에 놓이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노송을 교차로 한가운데 남겨둔 채로 도로 확장과 포장 공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노송의 잎이 누렇게 변색하더니 빠르게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누가 밤중에 독을 주입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지역 언론에 노송이 말라 죽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그리고 그만이었다. 아무런 추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누가 봐도 분명히 도로공사 관계자들과 연관이 있는 사건이었다. 제주에서도 소나무 벌채는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이를 어길 시에는 형사 입건되어 엄한 벌을 받았다. 당시 도지사와 만날 기회가 있어 대화를 나누던 중 이 노송이 사라진 사건을 거론하며 당국에서 반드시 범인을 찾고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후속 조처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백주에 도로 한복판의 국보급 소나무에 누군가가 독을 주입해 나무가 잘려 나갔는데, 아무런 수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넘어간 것이다. 우리나라 지도층의 생태 감수성이 얼마나 미개한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두 번째로 내가 충격받은 일은 내가 매일 숙소에서 교구청 사무실로 출퇴근하는 중앙로에서 일어났다. 제주도정은 어느 날 제주에서 제일 통행량이 많은 중앙로에 버스전용차로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중앙로 한 구간에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가로수길이 100m도 훨씬 넘게 이어져 있었다. 가로수가 차도와 인도를 구분하는 가장자리에만 있을 뿐 아니라 차도 가운데에 길게 서 있어 상하행선의 분리대 구실을 해주고 있었다.

이 가로수는 구실잣밤나무라고 하여 도토리보다 조금 납작한 열매가 열리는 참나뭇과인데 수령이 꽤나 오랜 듯 둥치가 상당히 굵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근처 주부들이 열매를 주우러 통행하는 자동차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나도 이곳을 지날 때마다 도심 한복판 고목들의 도열에 마음을 뺏겨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제주시에서 통행량이 제일 많은 도로에 이런 보물 같은 구실잣밤나무들이 용케도 생존해 주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행정당국이 버스전용차로제를 도입하면서 이 보물들이 또 사라져 버렸다. 버스전용차로가 생겨 버스의 통행속도가 몇 분 빨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버스가 몇 분 더 빨리 달리는 것이 수십 년 자란 고목을 수십 그루 베어낼 만큼 중대한 일이었을까?

이뿐이 아니다. 제주시민이 제주시에서 동쪽 끝머리에 있는 성산포 쪽으로 이동할 때 여러 길로 갈 수 있으나 비교적 선호도가 높은 길이 중산간 지역을 달리는 ‘비자림로’다. 비자림로는 2002년 건설교통부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 선정했다. 자치단체들이 추천한 전국 88개 도로 가운데 미관이 뛰어나 대통령상까지 받았다.

당시 건교부는 도로 및 환경전문가, 여행가, 사진가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비자림로가 “천혜의 자연경관이 잘 보존됐고, 환경과의 조화, 편리성 등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아름다운 도로로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제주시와 성산포 사이를 오가려면 일주 도로나 다른 간선도로 이용도 얼마든지 가능한데 행정 당국은 2018년 굳이 2.9㎞의 아름다운 삼나무 2400여 그루를 베어내면서 비자림로를 두 배로 확장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환경단체 전문가들이 불과 며칠이라는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조사해 보니 비자림로에는 천연기념물 팔색조, 멸종위기종 애기뿔쇠똥구리를 비롯해 법정보호종으로 지정된 다수 생물들이 확인되었다. 이 공사로 인한 자연 훼손과 생태계 파괴에 대한 비판과 항의가 전국에서 빗발치고 공사가 세 번이나 중단되었으나 행정당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이고 있다. 생태계에 대한 인간들의 무신경한 전횡과 폭력이 도에 넘친다.

그런데 최근 또 비슷한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 출퇴근 시간에 제주 시내의 서쪽과 동쪽을 오가는 차량 통행이 많아 길이 좀 막힌다. 대부분 차량은 편도 차로가 둘 이상인 간선도로를 이용한다. 그러나 옛날부터 익숙하던 신제주와 구제주를 잇는 편도 1차로의 구도로를 이용하는 시민들도 여전히 적지 않아 출퇴근 시간에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런데 최근 이를 편도 2차로로 확장하려는 계획이 발표되자 논란이 적지 않다.

이 길에 수령 50년이 넘은 구실잣밤나무 75그루가 가로수로 늘어서 있다. 키가 10m를 넘고 여러 갈래로 뻗은 줄기가 길 양편에서 도로 가운데로 뻗어 숲 터널을 이룬다. 굵은 몸통에 새파란 이끼까지 끼어있어 오랜 세월을 버텨온 관록을 자랑하듯 장엄하게 버티고 서있다. 겨울이 되어 다른 나무들은 잎들이 색을 잃거나 떨어져 가지만 앙상하지만, 구실잣밤나무는 여전히 검푸른 잎을 가득 달고 하늘을 가리며 오가는 행인들의 마음을 푸근하고 엄숙하게 해준다. 45년 세월을 두고 한자리에 굳건히 서서 추위와 더위를 견디어 내고 줄지어 오가는 자동차들의 매연을 마셔가며 시민들에게 햇빛을 가려주는 그늘을 제공하고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준 75그루의 귀한 생명들을 출퇴근에 몇 분 더 빨리 가기 위해 모조리 베어버린다면 이는 인간 편의주의의 야만적 문명에 의한 것이다.

기후위기에서 오는 생태계 교란으로 지구상의 생명체 군이 급속도로 멸종되고 있다. 북극곰, 코끼리, 고래, 두루미와 같은 크고 아름다운 동물은 사람들 눈에 띄지만, 눈에 잘 안 들어오는 작은 곤충이나 절지동물은 이미 상당수 사라졌다. 곤충이 사라지면 이를 먹이로 살아가는 조류도 생존이 불가하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축을 인간의 반려로 간주하고 그 식용을 법으로 금할 만큼 동물권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해진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생태계에 대한 우리 감수성을 이제는 집에서 키우는 몇 종의 동물에 한정하지 말고 나무와 풀로까지 확장해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도로를 확장해도 도로 면적이 확장된 만큼 현대인들은 자동차 대수를 또 늘려 새로운 도로가 다시 자동차로 꽉 막히게 만드는 것이 우리들의 끝없는 욕망의 속성이다. 생명의 못자리를 무차별 파괴하는 반생태적 폭력과 탐욕에서 벗어나야 우리 공동의 집을 지키고 후손들에게 아름답고 살기 좋은 보금자리를 물려줄 수 있지 않을까?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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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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